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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경의 창] 재벌에 당부하고 싶은 것 - 이연호 원장 (20150108 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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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1-09 00:00:00

[매경의 창] 재벌에 당부하고 싶은 것

기사입력 2015.01.08 17:06:11 | 최종수정 2015.01.08 17:14:38


필자가 1990년대 영국에서 유학을 하던 때의 일이다. 영어 실력도 늘릴 겸 조그만 TV를 하나 사기로 했다. 그래서 한 가전제품 가게를 방문해 한국산 제품을 찾았으나 온통 일본 제품만 있고 도대체 보이질 않았다. 열혈 애국청년이던 필자는 한국 제품을 사지 않는 것은 모국에 대한 일종의 배신처럼 생각이 들어 가게 점원에게 한국산 제품을 꼭 찾아달라고 고집을 부렸다. 연말 세일로 가격도 저렴한 일본산 TV를 사라고 설득하던 점원은 나의 고집을 꺾지 못하고 결국 창고에서 국산 제품을 하나 가지고 왔다. 일본산보다 가격 조건이 좋지도 않았지만 애국한 것 같은 뿌듯한 마음으로 물건을 사들고 왔던 기억이 생생하다.

우리의 경제 발전 원인을 설명하면서 종종 정부의 리더십이나 제1세대 경제인들의 기업가정신을 꼽는다. 그러나 발전론을 공부하면서 진짜 결정적인 기여자는 묵묵히 정부의 지시를 따르고 국산품을 사용하고 교육에 많은 투자를 했던 애국적 국민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공무원과 기업가의 공헌을 평가절하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엘리트들의 역할은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은 아니다. 아무리 훌륭한 리더가 있어도 인적 자원이 축적되지 않는 한 경제성장은 불가능하다. 훌륭한 병사가 없는데 장수가 수백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소위 ‘땅콩 회항’ 사건의 전말에서도 보듯이 우리 사회의 불평등 문제는 국민이 재벌 기업에 느끼는 일종의 서운함과 깊은 관련이 있다. 과거 박정희 전 대통령은 대기업을 육성하면서 재벌이라는 단어도 사용하지 못하게 했고, 대기업은 사기업이 아니라 국민 모두의 기업이라고 역설했다. 그리고 각종 정보기관을 동원해 재벌 가족들이 저지를지 모를 사회적 일탈을 감시했다. 국민 간의 분열을 막으려는 시도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국민 누구도 우리 대기업이 국민의 기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특정 가족의 사적 소유물일 뿐이다. 재벌들 역시 국민의 주인의식을 용납할 리 만무하다.

금융위기 이후 줄곧 대기업들은 이기적 생존 논리를 내세우며 국내 투자보다는 해외 투자에 열심이다. 그러다 보니 국내에서 고용이 늘어날 리 없다. 졸업 후 직장을 구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는 제자들을 보는 나 같은 교수들 심정은 참담하다.

다시 금융위기가 발생해도 국민은 금 모으기를 또 할까? 싸고 좋은 외국 제품을 애써 외면하며 굳이 국산품을 구매하려 할까? 솔직히 자신이 없다. 경제적 애국이라는 개념은 우리 국민에게 더 이상 의미가 없다. 그래서 수입차를 사고 수입 맥주를 마시고 해외 직구를 한다. 의리를 지키지 않는 재벌에 국민이 부릴 수 있는 반항일지 모른다.

아무리 생각해도 해결의 실마리는 재벌들이 내놓아야 할 것 같다. 반재벌정서가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는 것을 나 같은 학자도 그리고 모든 정보를 갖고 있는 그들도 안다.

그렇다면 왜 행동에 옮기지 않는가? 유럽에서 복지국가는 자본과 노동 간 계급적 타협의 산물이었다. 가진 자들이 조금 손해 보고 산다고 생각해야 문제가 풀린다. 통 크게 접근해야 한다. 단순히 돈의 문제가 아니라 감정과 심리 문제다. 국민의 마음을 풀어줘야 한다.

대기업들은 우리나라에서 기업 하기 어렵다고 불평한다. 그러나 밑을 보라. 부모 수입의 절반 이상이 투입된 우수한 인재들이 무한 공급되고, 국민은 우리 대기업에 대한 자긍심을 버리지 않고 있다.

최소한의 지분을 가지고도 경영 자질 검증을 거치지 않은 가족들이 소유와 경영을 장악할 수 있는 곳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우리나라가 유일할지도 모른다. 이 땅이 여전히 그들의 든든한 보호처다. 한국 기업의 발전 자원은 이제 정부가 아니라 시민이다. 우군으로 만들지 적군으로 만들지 재벌들의 선택에 달려 있다.

[이연호 연세대 동서문제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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