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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경의 창] 대의민주주의와 결정장애 신드롬 - 이연호 원장 (20151231 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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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1-04 00:00:00

[매경의 창] 대의민주주의와 결정장애 신드롬

기사입력 2015.12.31 16:52:47 | 최종수정 2015.12.31 18:24:18


얼마 전 야당 분당사태를 다루는 텔레비전의 한 전화 인터뷰에서 모 의원이 다음과 같은 취지의 발언을 하는 것을 우연히 들었다. "우리는 지역 유권자의 여론을 선도할 위치에 있지 않다. 다만 그들의 의견을 국회에 전달한 뿐이다." 실로 우리 정치엘리트들의 솔직한 모습이 아닐까 싶다.

우리 국회는 다양한 실력자들의 집단이다. 자신이 직접 집행할 수 있는 예산 규모는 자치단체장보다 적다. 그러나 행사하는 권력이 크고 대우가 매우 좋으며 지역구를 기반으로 중앙에서 활동하다가 장차 대권에도 도전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위치에 있어 능력자라면 너도나도 국회의원이 되려는 욕망을 갖는다. 이렇게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만 이들은 대부분 `결정장애 신드롬`을 겪고 있다. 지역구의 여론이 확인되기 전에는 그리고 당론이 결정되기 전에는 절대 용기 있게 결정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책임지는 것이 두려워서이다. 자칫 유권자나 당의 방침에 어긋나는 행동을 했다가는 공천을 받지 못하거나 낙선해 만년 정치 낭인의 신분으로 추락하기 십상이다. 한 조사에 따르면 19대 총선에서 재선에 성공한 의원은 23.3%, 3선은 16.7% 그리고 4선은 6.35%에 불과하다. 치열한 생존경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정치제도를 논할 때 직접민주주의보다 대의민주주의가 좋은 점은 엘리트들이 충분한 시간을 갖고 정책을 숙의하고 공익에 부합하는 결정을 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직접민주주의는 다수의 선호에 충실할 수는 있지만 이들이 자신들의 이기적인 이익에만 함몰되어 거시적인 시각을 결여하기 쉽고 그래서 극단적으로 공익에 반하는 다수의 전제가 일어날 수 있는 문제가 있다.

대의제를 지지한 영국의 철학자요 정치가인 존 스튜어트 밀이 다수제 민주주의하에서 가장 경계한 것 중 하나가 다수의 특정계급이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키는 계급입법이었다. 대의제 민주주의는 숙련된 전문성과 공적인 선의를 가진 계몽된 소수가 유권자 개개인의 이익을 초월하는 결정을 내리는 성숙한 민주주의를 지향한다.

시민을 대표하는 정치인들이 공익에 부응하는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마냥 미루다보면 나라가 위기에 빠지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일반 시민들의 몫이 되고 만다. 1997년 겨울 김영삼정부는 금융시장 감독을 강화하기 위한 금융시장 감독기구 설치 법안의 입법에 실패하고 결국 그해 11월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 지원을 요청하기에 이른다. 사건의 발단은 1996년 말 김영삼정부가 국회 통과를 강행했던 노동관계법 개정이었다. 이후 정부는 야당과 노동계로부터 역공을 받아 금융시장 개혁을 위한 입법에 실패한 채 금융위기를 맞이했다. 그런데 노동시장 유연화를 위한 2·8사회협약과 금융감독기구의 설립을 골자로 한 금융개혁 법안의 실행을 가능케 한 것은 역설적으로 1997년의 금융위기였다. 법안에 부정적이었던 김대중정부와 여당이 된 새정치국민회의는 집권 후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노동 및 금융개혁을 일사천리로 진행했다. 시민들이 절망적으로 금 모으기를 해야 했던 데에는 정부의 실책과 더불어 정치엘리트들의 책임이 있었다.

현명한 엘리트들은 역사를 읽으며 미래에 닥칠 위기를 피해간다. 그러나 어리석은 엘리트들은 겁쟁이처럼 숨어 있다가 위기가 닥쳐서야 정치적 희생양을 만들어 책임을 돌리고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법석을 떤다. 대의민주주의는 단순히 유권자의 여론을 국회에 전달하는 제도가 아니다. 국회는 시민들의 선택을 받은 계몽된 엘리트들이 모여 이성과 양심을 가지고 공익을 위해 숙의하는 곳이다. 1987년, 1997년 그리고 2008년. 매 10년마다 정치지도자들의 방관 속에 위기는 발생하고 시민들은 스스로 위기를 헤쳐간다.

우리에게 또 위기가 필요한 것인가? 자신이 아니라 시민의 생존을 생각하는 정치지도자들의 용기를 촉구한다.

[이연호 연세대 동서문제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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