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itute of East and West Studies • Yonsei University

언론소식

[창간 6주년 기획] 이광재가 원로에게 묻다 ①남덕우 전 총리 - 이광재 객원교수 (20130310.중앙sunday)
  • 관리자
  • |
  • 2622
  • |
  • 2013-12-20 00:00:00

 

강대국과 양자외교 어려워 … NASO만들어 국제 문제 풀어야

[창간 6주년 기획] 이광재가 원로에게 묻다 ①남덕우 전 총리

대담·글=이광재 객원 칼럼니스트·전 강원도지사 | 제313호 | 20130310 입력
 
서울 강남의 산학협동재단에 위치한 남덕우 전 총리의 사무실에 들어서니 컴퓨터를 보면서 뭔가 열심히 치고 있는 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90세란 나이가 믿기지 않게 정정한 모습이었다. “컴퓨터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한다”고 말하는 남 전 총리는 KBS TV가 자신을 주제로 제작한 다큐멘터리 3부작 시나리오를 직접 수정하고 있던 중이었다. 건강 비법을 물으니 매일 팔다리, 목, 허리 관절을 좌우로 각각 열 번씩 돌린 뒤 걷는다고 한다. 남 전 총리는 자기관리에 철저했다. 30년 전부터 가장 최근 통계까지 정확히 꿰고 있었다. 경제위기와 북핵, 남북 통일 등 한국이 당면한 문제들의 해법을 현직 정책 결정자들만큼이나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남덕우 1960년대 대학에서 성장이론을 강의하다 69년 박정희 당시 대통령에 의해 재무부 장관에 전격 발탁됐다. 이후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과 대통령 경제특보·국무총리를 맡아 14년간 한국의 경제개발을 진두지휘했던 우리 경제사의 산증인. 박정희 정부 시절 8·3 사채동결과 중화학공업 육성 등 굵직한 정책들이 그의 손에서 이뤄졌다. 공직을 떠난 뒤에도 한국무역협회장과 선진회포럼 이사장, 산학협동재단 이사장 등을 지내며 한국의 나아갈 길을 조언해 왔다. ‘화이부동(和而不同)’을 삶의 지침으로 삼는 그는 여당과 야당이 입장이 다르더라도 대화를 통해 타협을 찾는 것이 국정의 요체라고 강조한다. ▶1924년 경기 광주 출생 ▶국민대 정치학과 ▶서울대 경제학 석사·미국 오클라호마주립대 경제학 박사 ▶국민대·서강대 교수 ▶재무부 장관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대통령 경제담당 특별보좌관 ▶국무총리 ▶현 산학협동재단 고문

 

이광재 노무현 전 대통령의 국회의원 시절 그의 보좌관으로 정계에 입문해 17, 18대 국회의원과 강원도 지사(2010~2011년)를 지냈다. 노무현 정부에서 청와대 국정상황실장을 역임했다. 1965년생(48세)으로 원주고와 연세대 법대를 졸업했다. 

 
-1969년 재무부 장관으로 발탁되면서 박정희 전 대통령과 인연을 맺었다.
“당시 서울 강서구 화곡동에 내 집을 짓고 있었는데 경비를 아끼려고 직접 공사 감독을 했다. 어느 날 이승윤 서강대 교수가 지프를 타고 와 ‘급히 들어오라’는 청와대의 전갈을 전했다. 이 교수는 ‘곧 개각 발표가 있을 것’이라 귀띔했다. ‘정부에 들어오라 하면 어떻게 해야 하나’ 물으니, 이 교수는 ‘할 수 없죠. 가셔야죠’라고 대답했다. ‘운명이다’라고 나를 타이르며 청와대로 향했다. 당시 박 대통령이 장관 임명장을 주고 나서 내게 말했다. ‘남 교수, 그동안 정부가 하는 일에 비판을 많이 하던데 이제 맛 좀 봐’. 그 뒤로 14년 동안 나는 정부 관료의 쓴맛, 단맛을 톡톡히 본 셈이다.”

-지금은 박정희 대통령의 딸이 대통령이 됐다. 박근혜 대통령을 만나본 일이 있나.
“난 대선 전이나 뒤에 박근혜 대통령을 만난 일이 없다. 박근혜 후원회장을 맡아 달라고 해서 맡은 것뿐이다. 박근혜 정부가 잘돼야 한다. 지금 한국이 엄중한 시기를 맞았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우리 경제가 위기다. 해법은 무엇인가. 경제 패러다임을 바꾸어야 한다는 지적도 많은데.
“사람들은 전혀 색다른 뭔가가 나오길 바라는데 그건 있을 수 없다. 지금 소비를 가로막고 있는 게 가계부채니 이걸 해결하는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 한다. 그 다음에 투자인데 요즘처럼 반기업 정서가 심한 때가 없었다. 그저 경제민주화라고 재벌을 때리니 기업들이 사업 의욕을 상실할 정도가 돼버렸다. 우선 기업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심어주고, 규제는 최소화하고, 세액공제나 정책금융 등 특단의 재정조치를 해줘야 한다. 장기 대책으로 중소기업의 진흥과 사회복지의 확충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우리 기업체의 1%를 차지하는 대기업이 전체 생산액의 76%를 만드는데 99%에 달하는 중소기업의 생산액은 24%밖에 안 된다. 사회보장비도 독일은 국내총생산(GDP)의 40%이고 일본도 28%인데 우리는 18%에 불과하다. 따라서 중소기업의 생산성 향상과 복지 확충이 선진화의 요건이다. 문제는 재원 마련이다.”

-동의한다. 재원을 어떻게 마련하나.
“아무래도 증세가 불가피할 것으로 생각된다. 저소득층에 영향이 가지 않는 범위에서 증세 방안을 강구할 필요가 있다. 또 경기부양을 위해 일시적인 적자재정도 생각해볼 만하다. 하지만 국채를 국민이나 외국에 마구 팔다가 국고가 거덜난 그리스, 스페인식 적자재정은 안 된다. 법으로 일정 한도 내에서 정부가 적자재정을 하되 경기가 호전되면 단기부채를 완전 상환케 해야 한다. 재정학에서 이걸 ‘보완적 재정정책’이라고 한다.”

 

위 재무부 장관 시절 국회 재무위원회에서 물가대책을 보고하고 있는 남덕우 전 총리. [중앙포토] 아래 1976년 1월 남덕우 부총리(오른쪽)가 박정희 대통령에게 새해 경제시책을 보고하고 있다. [중앙포토]

-이런 정책을 한 좋은 외국 사례가 있나.
“그건 잘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나라 GDP가 지난해 4% 성장했지만 올해는 2%도 못할 것으로 보일 경우 지난해 GDP의 2% 범위에서 적자재정을 하는 게 바람직하다. 그러다 경제가 4% 성장을 하면 정부가 부채를 상환해 균형을 유지하는 게 건실한 정책이다. 이러면 세계가 ‘한국, 잘한다’ 할 거다.”

-지금 가계부채가 1000조원에 달해 민간 소비여력이 없다. 특단의 조치로 가능한 게 있나.
“부채상환 기한을 연장해주는 동시에 금리를 내려줄 수밖에 없다. 그리고 가계부채를 정부가 사들이고 금리를 내려주는 방법도 있다. 판매채라는 건데 박근혜 대통령도 대선 공약으로 가계부채를 자산관리공사에서 매입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좋다고 생각한다. 채무자의 자구노력을 금리에 반영해 도덕적 해이를 막는 동시에 금융기관의 신용평가방법을 선진화해야 한다.”

-사실 노무현 정부 때 그런 방법을 검토했지만 도덕적 해이 우려 때문에 접었다. 그때보다 지금이 훨씬 심각한 상황인 것 같다. 재원 마련을 위해 부가세 인상이 논의되고 있는데 어떻게 보나.
“내가 72년 재무부 장관 시절 부가세를 도입할 때 김종인·김재익 전 청와대 경제수석 등 4명을 유럽에 파견해 조사를 시켰다. 이들이 귀국해 보고하기를, ‘첫째 복수의 세금을 만들지 말고, 둘째 계산하기 쉬운 숫자를 택하라’고 하더라. 그래서 부가세율이 10%로 된 거다. 부가세는 현재 정부 조세수입의 35%를 차지하는 주축인데 손을 대는 건 적절치 않다고 본다. 대신 GDP의 2.5%를 차지하는 조세감면액(30조~35조원)을 재검토하면 얼마를 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부족하면 세금을 올리되 저소득층에는 영향이 없게 해야 한다. 결국은 고소득층이 세금을 더 부담할 수밖에 없다.”

-어떤 나라든 흥망성쇠를 거듭한다. 국가를 흥하게 하는 요소는 무엇이고 망하게 하는 요소는 무엇인가.
“리더십이 나라의 흥망성쇠에 가장 중요하다. 리더십의 요체는 국민한테 비전을 제시하는 거다. 우리나라의 기본 문제가 무엇인데 우리가 합심해 이렇게 해결하면 더 잘살 수 있다는 비전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거다. 그렇다면 지금의 비전은 무엇일까? 선진화도 나왔고, 민주화도 나왔는데 나는 ‘성숙한 한국으로 가자’는 것이라고 본다. 살기 좋고, 기업 하기 좋고, 공평하고 안전한 나라를 만드는 거다. 그러려면 정치도 후진성을 극복해야 되고, 국민도 정신적으로 자각이 있어야 된다. 그래도 국민이 옛날과는 많이 달라졌다.”

-박정희 시대의 리더십은 어땠나.
“흔히 박정희 시대를 독재라고 하는데 그때도 엄연히 3권 분립이 있었다. 김일성이나 스탈린식 독재는 아니었고 나는 권위주의 시대였다고 본다. 한국을 연구하는 미국인들도 권위주의라고 한다. 그때의 비전은 누가 봐도 북한의 남침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에 국민 100%가 찬성했다. 국가 비전과 국가원수의 지도 방향이 딱 맞은 거다. 그래서 박정희 체제에 불만이 많았음에도 18년을 지속한 거다. 지금은 그렇게 우리가 갈 방향이 단순명백하지 않다. 그래서 민주화니 선진화니 여러 말이 나오는데 난 성숙된 정부, 성숙된 국민, 성숙된 정치로 가자는 거다. 대통령과 장관들이 TV에 나와 국민을 설득해야 한다. 한마디 더 하고 싶은 게, 청와대 비서실이 너무 비대해졌다는 거다.”

-청와대 비서실이 어떻게 비대해졌나.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 청와대 비서실에선 비서실장 한 명만 장관급이었다. 그리고 박 대통령은 장관을 비서처럼 부려먹었다. 미국에서도 장관을 ‘secretary(비서)’라고 하지 않나? 그런데 요즘 장관들은 청와대 수석비서관 눈치나 보고 있다. 이러면 안 되고 장관들이 TV에 나와 직접 국민을 설득해야 한다. 예를 들어 4대 강에 대해 이런저런 비판이 있는데 사실인 것도 있지만 이 사업 덕에 홍수가 조절됐다면서 국민을 이해시켜야 한다. 그런 걸 안 하니 TV에 정부가 잘못한 것만 나오는 거다.”

-장관 임기가 짧으니 눈치를 보는 것 아닌가. 장관 임기가 정권과 같이 가는 게 바람직할 것 같다.
“같이 가야 한다. 난 재무부 장관을 한 달 모자란 5년, 부총리를 4년3개월 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나 같은 경제장관들에게 ‘정치는 내가 맡을 테니 임자들은 경제개발에만 주력하라’고 했다. 그분은 정치는 자신이 막는다는 확신이 있었다. 그러니 나 같은 사람을 갖다 5년을 쓴 거다.”

-총리께서 쓰신 책을 보니 오일쇼크 이후에 중화학공업을 해야 한다고 기업들을 독려하는 대목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재벌의 문제점을 막고 투자를 유도하도록 하는 방안으론 무엇이 있나.
“재벌이 왜 재벌이 됐나? 우선 소비자의 선택이다. 특정 기업이 만든 물건이 좋으니깐 그것을 산다. 그 결과 그 기업이 재벌까지 간 거다. 둘째는 산업구조의 변화다. 노동집약적인 산업은 중소기업들이 하지만 요즘 조선, 자동차, 전자사업은 어쩔 수 없이 대기업들이 한다. 이 두 가지 조건이 합쳐져 재벌을 만든 것이다. 물론 일감 몰아주기나 중소기업과의 불공정 거래 같은 재벌들의 문제점은 고쳐야 한다. 공정거래법을 고치라는 것이다. 그러나 무조건 재벌 때리기는 안 된다.”

-중화학공업을 70년대에 육성할 때 재계를 어떻게 설득했나.
“그것도 리더십의 문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아니면 못했다. 72년께 미국이 월남에서 발을 빼기 시작했다. 우리나라도 공산주의에 넘어갈지 모른다는 ‘도미노 이론’이 확산되면서 큰 위기가 닥쳤다. 박 전 대통령이 대비책을 강구했다.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을 북한에 밀파해 7·4 공동성명을 내는 한편 미국에만 의존하던 국방을 자주국방으로 전환하는 계획에 착수했다. 경제도 경공업에서 중화학공업으로 전환하지 않으면 수출이 안 되는 시대가 온다는 게 그분의 철학이었다. 비화가 많이 있다. 오원철 수석이 중화학공업 개발계획을 거창하게 내놨는데 자금조달 방안은 하나도 없었다. 재무부 장관인 나는 큰일 났다는 생각에 대통령에게 이 문제를 보고했다. 대통령은 ‘남 장관, 일본은 세계를 상대로 싸우다 패망했지만 국민이 경제개발에 전력을 기울여 경제대국이 되지 않았나. 나는 국가운명을 걸자는 게 아니라 다만 경제운명을 걸고 중화학공업만 해보자는 거다’면서 날 설득하더라. 그래서 고민을 거듭하다 정부가 보유한 여러 가지 공적 기금을 하나로 합쳐 공공사업을 하는 일본의 자금운용 방식을 떠올렸다. 그래서 정부에 속한 각종 기금을 다 조사해봤지만 금액이 턱없이 모자라더라. 고심 끝에 은행들에 전년도 저축성 예금 증가액의 20%를 국민투자채권으로 사게 해서 그 돈을 중화학공업에 배정하게 했다. 그렇게 조달한 금액이 27조원이다. 지금은 270조원쯤 될 액수다. 그걸로 중화학공업을 했고 금융시장 질서를 유지했다. 그렇게 하니까 74, 75년께 세계경기가 호전되면서 수출이 늘어나 처음으로 1200만 달러의 경상수지 흑자를 냈다. 박 전 대통령이 경제장관회의에 나와 ‘남 부총리의 영도하에 경제장관들이 잘해서 우리가 드디어 국제수지에 흑자를 냈다’고 하더라. 결국 박 전 대통령 때문에 된 거다.”

-남북문제는 어떻게 풀어야 하나.
“우리는 힘이 없어 강대국과의 양자외교는 어렵다. 즉 한국 대 일본, 한국 대 러시아, 이래선 안 되고 지역적 협의체를 만들어 다국화로 문제를 풀어가야 한다. 나는 그 이름을 ‘NASO(North-East Asia Security Organization·동북아안보협의체)라고 붙였다. 남북 통일은 물론 환경 등 각종 국제문제를 여기서 푸는 것이다. 한국과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까지 들어오고 북한도 나중에 들어올 수 있게 하면 된다. 이런 체제하에서 동북아개발은행을 만들어 자원을 분담하면서 북한과 동북아 일대의 경제를 개발하는 것이다. 오호츠크해가 세계 최대 어장이고 시베리아는 천연가스 보고(寶庫)다. 이걸 관련국들이 협력해 개발하면 큰 이익을 볼 수 있다. 그걸 할 수 있는 지도자가 중국에서 나올까, 일본에서 나올까? 난 한국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이와 함께 한·미·일 3각 연대를 확고히 하고, 중국에는 우리가 바라는 통일이 중국의 국익과 합치한다는 걸 설득해야 한다. 동북아 4강과 유엔이 우리의 통일 노력을 지지하도록 하는 게 우리 외교의 기본과제다.”

-국가원로로서 우리나라 지도자와 국민, 젊은이들에게 한마디씩 해준다면.
“지도자에겐 국가 우선과제를 파악하고 국민에게 비전을 제시해 이끌어나가라고 말하고 싶다. 국민은 정부가 하는 일을 깎아내리지 말고 협력하는 정신을 갖자고 하고 싶다. 박정희 정부 시절 일본에서 이토라는 대장성 대신을 만났는데 그 사람이 ‘일본인과 한국인을 일대일로 붙이면 한국인이 이기지만 3대3으로 붙이면 일본인이 이긴다’고 하더라. 아직도 그 말이 뼈저리게 남아 있다. 젊은이들에겐 ‘한국 사람은 우수하다. 꿈을 갖고 성숙된 한국을 여러분의 힘으로 만들어가라’고 하고 싶다.”

-인생이란 무엇이고, 가장 중요한 덕목은 무엇인가.
“인생이란 건 결국 먹고살면서 가치를 추구하는 것 아닐까. 도둑질하는 사람도 나름의 가치가 있을 거다. 가장 중요한 덕목은 국가이념이다. 구체적으론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인데 이건 글로벌 가치이지 한국만의 가치가 아니다. 그런데 아직도 그걸 이해하지 않는 좌파 논리가 안타깝다.”
 
 
이전글 "[기고] 재정·노동시장 개혁 왜 뒤로 미루나" 이두원 국제개발협력프로그램센터장(2013.9.13. 매일경제)
다음글 창간 6주년 기획 이광재가 원로에게 묻다 ②조순 전 경제부총리 - 이광재 객원교수 (20130324.중앙sunday)
비밀번호 입력
비밀번호
확인
비밀번호 입력
비밀번호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