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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6주년 기획 이광재가 원로에게 묻다 ⑥ 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 -이광재 객원교수 (20130519 중앙sun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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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12-23 00:00:00

 

“남북, 평화 통일 말고는 길 없어 … 북핵 포기와 동시에 북·미, 북·일 수교해야”

창간 6주년 기획 이광재가 원로에게 묻다 ⑥ 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

대담·글=이광재 객원 칼럼니스트·전 강원도지사 | 제323호 | 20130519 입력
난세를 만나거나 길이 보이지 않을 때눈을 돌려 역사를 보라 했다. 입에 담기조차 부끄러운 성추문으로 청와대가 흔들리는 시점에서 원로 역사학자 강만길(80·사진) 교수를 만났다. 독재 시절이던 1970, 80년대 새로운 민족주의적 시각으로 분단현실을 파고든 강 교수의 책은 리영희 전 한양대 교수의 저서와 더불어 대학생·지식인들의 필독서였다. 그런 강 교수를 눈엣가시로 여긴 전두환 군사정부는 그를 4년간 강단에서 내쫓았다. 그는 그럴수록 학문에 매진해 분단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저서를 내면서 사학계의 혁신을 이끌었다. 민주화 운동에도 적극 참여해 ‘행동하는 지식인’의 길을 걸었다.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 때 역사학자로는 유일하게 동행한 강 교수는 노무현 정부 당시 장관직을 제의받았지만,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지난 2월부터 두 차례 강 교수가 낙향해 사는 강원도 양양 바닷가로 찾아갔다. 강 교수는 동해 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작은 집에 살고 있었다. “역사의 교훈을 듣고 싶다”는 청과 함께 시작된 인터뷰는 1000년 고찰 낙산사 옆의 찻집에서 7시간 넘게 이어졌다. 인터뷰 사진은 지난 2월 말 강 교수를 만났을 때 찍은 것이다. 
 

강만길 1970년대 중반부터 분단 극복을 화두로 삼아 한국 근·현대사 연구에 몰두해 왔다. 78년 낸 저서 『분단시대의 역사인식』을 통해 그때까지 학계에서 연구가 금기시돼 온 좌우합작운동 등 좌익 계열의 독립운동을 조명했다. 1933년 경남 마산 출생. 고려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고려대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고려대 한국사학과 교수와 박물관장을 지냈다. 80년 전두환 정부에 의해 교수직에서 강제해직 당한 뒤 84년 복직했다. 99년 정년퇴임 뒤 고려대 명예교수가 됐고 2001년부터 4년간 상지대 총장을 지냈다. 99년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상임의장, 2005년부터 2년간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 위원회 위원장을 각각 맡았다. 중앙문화대상 학술대상(92년)과 제13회 단재상(99) 등을 수상했으며 2007년 청조근정훈장을 받았다. 주요 저서로 『한국근대사』, 『한국 현대사』(84), 『통일운동시대의 역사인식』(90), 『한국 자본주의의 역사』(2000) 등이 있다.

 
 
-양양에 사는 기분이 어떤가.
“아침 해가 바다에서 뜨는 것을 보는 게 참 아름답다. 매일 아침 조선 초 개국공신 하륜과 조준이 은거했다는 ‘하조대’를 기점으로 바닷가를 걷는다. 음악을 들으며 걷는다. MP3플레이어에 600곡가량 내려받아 놨다. 클래식은 차이콥스키를, 유행가는 고복수의 ‘나그네 설움’을 주로 듣는다. 사놓고 못 읽은 책을 읽고 일주일에 한 번은 척산 온천에 간다. 공기가 맑고 조용해 좋다. 매일 보는 파도가 다르고 바다의 빛깔도 다르다. 아름답다. 걷다 보면 옛일부터 시작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옛일 가운데 특히 기억나는 것은?
“고려대 김준엽 전 총장과 지냈던 일들이 생각난다. 김 전 총장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통일부 장관 제의와 노태우·김영삼 전 대통령의 총리 제의를 다 거절한 분이다. 내가 전두환 정권 때 교수직에서 해직됐을 때 애주가였던 김 전 총장한테 소주를 많이 얻어 먹었다. 말씀도 재미있게 했다. 일본 학도병으로 끌려갔다가 탈출한 얘기가 특히 재미있었다. 김 전 총장은 광복군 시절 결혼했는데 목사였던 장준하 선생이 주례를 섰다고 했다.”

-왜 역사를 공부하게 됐나.
“1950년 6·25 발발 당시 고교 2년생이었다. 전쟁은 참으로 처참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 모른다. 함경도에서 부산까지 걸어서 피란 온 사람을 보기도 했다. 그 끔찍했던 경험이 역사, 특히 우리 역사를 전공하게 한 것 같다.”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의 ‘사(史)’ 자는 ‘가운데 중(中)’ 자를 손으로 쥔 형상이다.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현실만 직시하는 거다. 미래를 배우는 것이다.”

 

 1 2000년 남북정상회담에 동행한 강만길(뒷줄 왼쪽) 교수가 김대중 대통령 등과 노래를 부르고 있다. 2 80년 해직됐던 강만길(오른쪽 둘째) 교수가 4년 만인 84년 고려대에 복직될 때 모습. [중앙포토]

-역사는 발전하는가.
“물론 발전한다. 역사는 인간생활의 종합체다. 인간의 노력으로 역사는 발전해왔고 또 발전해갈 것이다. 역사의 발전이 일시 멈출 수 있다. 그러면 그걸 회복하기 위한 혁명이 일어난다. 정치적으로는 모든 사람이 권력의 속박에서 자유로워지고, 경제적으론 모든 사람이 고루 잘 살고, 사회적으론 모든 사람이 평등해지고, 문화적으론 모든 사람이 사상의 자유를 누리는 방향으로 역사는 발전한다.”

-역사를 보면 악인이 더 잘 살기도 한다. 역사의 신은 있는가.
“앞에서 말한 역사의 발전 방향을 ‘신’이라 하면 ‘역사의 신’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신’은 종국에는 정직하다 할 수 있다.”

-지난 2000년 한반도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동북아에서 대륙과 해양세력이 충돌하는 위치에 놓인 한반도의 지정학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나라의 운명이 달렸다는 것이다. 중국이란 거대한 용광로에 붙어 있으면서도 굳게 지켜져 온 우리 민족의 주체성은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그러나 중세에서 현대까지는 대륙세력에 예속되거나, 해양세력에 점령당하거나, 남북끼리 갈라져 싸운 게 우리의 주된 운명이었다.”

-한반도 지정학 문제의 구체적인 사례를 든다면?
“1894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한반도를 식민지로 삼키려 할 때 러시아가 부동항을 구하려 한반도로 진출했다. 그러자 영국과 미국이 러시아의 남하를 막으려고 일본을 ‘극동의 헌병’으로 삼았다. 1904년 러일전쟁 때 영국·미국은 일본에 군자금의 절반을 빌려줬고, 일본이 유리한 상태에서 전쟁을 끝내줬다. 또 6·25전쟁 초기엔 대륙세력을 배경으로 한 북한에 의해 한반도가 통일될 뻔했다. 이로 인해 일본이 위험하게 되자 태평양이 ‘미국의 호수’가 아니라 ‘빨갱이의 호수’가 된다고 우려한 미국이 참전한다. 그 결과 한반도 전체가 해양세력 자본주의권에 들어갈 상황으로 바뀌자, 이번엔 중국 육군과 소련 공군이 참전해 막았다. 이 같은 한·미·일 대 북·중·러의 대립 구도는 결국 한반도의 분단으로 균형을 유지했다. 이런 한반도의 지정학 문제 해결이 민족 문제 해결의 기본이다.”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의 충돌로 한반도를 분할하자는 논의도 있었다.
“첫 번째는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일본이 조선 분할을 주장했다. 두 번째는 300년 후 청일전쟁 직전이다. 서구 열강들이 청일전쟁을 막으려고 한반도 북부는 청나라에, 남부는 일본 세력권에 두자는 안을 냈다. 평안·함경·황해 3도는 청나라에, 경상·충청·전라·강원 4도는 일본에 주고 조선 왕은 경기도만 지배하게 하자는 방안까지 나왔다. 그러자 일본이 한반도 전체를 손아귀에 넣으려고 전쟁을 도발했다.”

-한반도의 장래는 어떻게 풀어야 하나.
“전쟁으론 통일될 수 없는 곳이 한반도임은 6·25가 증명한다. 남북이 화합해 평화통일을 이뤄야 주변 강대국이 우리를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 독일 상비군이 30만 명인데 우리는 남북한에 100만 군인이 있다. 엄청난 군사비가 낭비되고 있는 거다. 남북이 지혜를 모아야 한다. 남북이 통일돼 일본에 치우치면 중국이, 중국에 치우치면 일본이 각각 고단해진다. 중·일이 대립하면 한국이 중간에서 조정자 역할을 할 수 있다.”

-북핵 위기를 극복하려면?
“1994년 북·미 제네바 합의와 2005년의 6자회담 9·19선언에서 북한의 핵 포기와 북·미 수교가 합의됐다. 그러나 지금도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한반도의 긴장은 격화되고 있다. 한국은 북·미 사이에서 적극적으로 중재에 나서야 한다. 미국도 클린턴 행정부의 대북정책을 계승해야 한다. 북한의 핵 포기와 동시에 북·미, 북·일 수교가 이뤄져야 한다. 남한은 소련·중국과 수교한 지 오래다. 따라서 북한도 미국·일본과 수교하고 일본으로부터 배상금을 받아 경제를 일으켜야 한다.”

-그러나 북한은 핵을 포기하지 않으려 하고, 한국에선 핵무장하자는 주장이 나온다.
“남이건 북이건 핵무기로는 통일이 불가능함을 알아야 한다. 남북이 통일되면 인구 8000만의, 독일만큼 큰 국가가 탄생한다. 이런 국가가 핵무기를 가진다면 주변 국가들이 허용하겠는가. 생각해봐야 한다.”

-일본은 1930년대처럼 우경화가 심해지고 있는데.
“남북분단의 근본 원인은 일본의 한반도 강점이었다는 사실, 6·25로 일본의 경제가 일어선 사실을 모르는 일본인이 많은 것 같다. 21세기 일본은 한반도의 평화통일에 적극 협력해 동북아시아의 평화정착에 노력해야 한다. 독일이 제2차 세계대전에 패전한 뒤 철저히 반성하고, 유럽통합과 국제평화에 기여해온 것을 배워야 한다.”

-러시아는 어떻게 봐야 하나.
“20세기 후반 한·미·일 동맹과 북·중·소 동맹 구도는 냉전 해소로 무너졌다. 하지만 동북아 해양세력으로서의 한·미·일 동조세력과 북·중·러 동조세력 간의 대립은 해소되지 않았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사상 처음으로 북한을 다녀갔다. 또 러시아는 북한을 거쳐 한국까지 천연가스관과 철도를 이으려 한다. 우리와 관계를 두텁게 하려는 것이다. 이런 러시아와 협력을 강화해야 한다.”

-동아시아의 근본적인 평화와 번영전략은 무엇인가.
“21세기 세계사는 민족국가의 벽을 무너뜨리고 지역공동체를 형성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유럽연합이 대표적인 예다. 프랑스와 독일이 강대국 행세를 하지 않은 게 유럽연합 발전의 요체였다. 중국과 일본도 중화주의와 대동아공영권식 사고를 버려야 새로운 아시아 시대를 열 수 있다.”

-남덕우 전 총리도 동북아 안보협의체와 동아시아 경제협력을 강조했다. 보수·진보 원로의 생각이 비슷한 것 같다.
“그것 참… (한참 생각하다) 은퇴하고 한 발짝 멀리 떨어져 보면 같은 길이 보이는 모양이다. 평생 역사를 공부해온 눈으로 보면 동아시아공동체로 가는 길이 최선이다. 머지않아 한국·일본·중국 사람은 같은 돈을 쓰고 상대국 언어를 자국어처럼 구사하며 비자 없이 왕래하게 될 거다. 중국과 러시아의 기차가 북한을 거쳐 부산까지 다닐 것이다.”

-남북이 통일되고 동아시아 공동체가 성립되려면 고도의 전략외교가 필요한데.
“일제 시대 때 일본식으로나마 군인·교사·기술자는 어느 정도 양성됐다. 하지만 일본의 외교관이 된 조선인은 한 사람뿐이었다. 주영대사관 참사관을 지낸 장철수씨였다. 그마저 해방 뒤 교수가 됐다. 우리나라 외교는 외교 경험이 전무한 사람들이 시작한 것이다. 게다가 한국의 외교는 너무 미국 중심이라 다양성이 결여됐다. 시야가 넓은 외교관을 배출하는 게 시급한 과제다.”

-러시아는 표트르 대제, 일본은 후쿠자와 유키치 같은 걸출한 인물이 국가의 운명을 크게 바꿨다.
“우리 사회는 사람을 키워 내는 능력이 부족한 것 같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요 사학자인 신채호 선생이 ‘영웅대망론’을 쓰며 새롭게 조명한 인물이 이순신이다. 바람직한 사람, 원대한 비전을 지닌 사상가를 길러내는 풍토는 반드시 필요하다.”

-우리가 사람을 키우지 못한 건 당파싸움이나 정적을 죽이는 정치문화 탓 아닌가.
“조선 시대 당쟁론은 통치술보다는 정치를 하기 위한 구실로서 존재했다고 할까. 너무 폐쇄적이었다. 고려는 쌍기란 중국인은 물론, 아랍인까지 등용했다. 반면 조선은 쇄국의 길을 걸은 결과 일제 식민지가 됐고 민족분단을 가져왔다. 이처럼 불행한 역사를 막으려면 서로 공존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역사에 가정이 없다지만, 만약 우리 역사를 가정해본다면.
“임진왜란 뒤 조선왕조가 망하고, 의병장이 왕이 되고 실학파가 집권했다면 나라의 운명은 달라졌을 것이다. 또 해방 공간에서도 좌우합작 정부를 운영해본 김구 선생이 처음엔 신탁통치에 반대하다가 이승만 박사가 남한 단독정부 수립론으로 나아가자, 남북 통일국가 노선으로 맞섰지만 이미 늦었다. 그 뒤에도 김구 선생은 통일국가 수립론을 고수하다 살해되고 말았다. 우리 현대사의 안타까운 대목이다. 반면 오스트리아는 제2차 세계대전 뒤 미국·영국·프랑스·소련의 신탁통치를 받았지만 좌우가 합작해 10년 만에 영세중립국으로 독립할 수 있었다.”

-박근혜 정부가 남북문제를 풀어내길 기대하는 사람들이 많다.
“나도 기대하고 있지만, 역사의식이 있어야 하는데 어떨지 모르겠다. 박 대통령이 북한과 대화를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북한이 중국에 넘어가는 건 우리 국민은 물론 북한도 바라지 않을 것이다. 북한은 남한과 가까워져야 살길이 열린다는 걸 직시해야 한다. 남한도 북한과 대화를 거부하면 북한은 중국에 치우칠 수밖에 없다. 민족사의 불행은 더욱 커지게 마련이다. 우리의 통일은 전쟁이나 흡수통일처럼 하루아침에 이뤄질 수 있는 게 아니다. 끈기 있게 원대한 서원(誓願)을 갖고 추진해 나가야 한다.”

-김종필(JP) 전 총재를 만나보려 한다.
“JP를 만나면 꼭 회고록을 남기라고 전해주기 바란다. 한 시대를 이끌었던 사람이 회고록을 쓰는 건 역사에 대한 책임이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인생은 전적으로 자기 책임이다. 남을 탓하지 말아야 한다. 흔히 하는 말이지만, 인간답게 사는 것, 즉 끊임없이 인간성 곧 양심에 비추어 보며 사는 것이 중요하다. 나도 평생을 학문과 교육에 몸바쳤지만, 나보다 나은 사람을 양성하는 데 얼마나 노력했나 반성하고 있다. 너무 고집부리며 산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있다. 욕심을 버리고 일상에 만족할 줄 아는 게 중요하다.”


이광재 노무현 전 대통령의 국회의원 시절 그의 보좌관으로 정계에 입문해 17, 18대 국회의원과 강원도지사(2010~2011년)를 지냈다. 노무현 정부에서 청와대 국정상황실장을 역임했다. 1965년생(48세)으로 원주고와 연세대 법대를 졸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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