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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부터 책더미 속에 살았고 책 만드는 심부름도 많이 했다. 어느 순간 책 곰팡이 냄새가 몸에 배더라. 고교생 때부터 책을 직접 만들었다. 벌써 60년이 됐다.”
-책이란 무엇인가.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도구다. 이 도구를 활용하지 않으면 인간이 될 수 없다. 어떤 제자가 스승에게 물었다. ‘당신이 돌아가시면 저는 누구에게 물어야 합니까?’ 그러자 스승은 ‘내가 죽으면 책에게 물어라’고 답했다고 한다. 책은 영원히 말씀으로 증언하는 것이다. 사람의 지혜와 기술을 모아둔 게 책이다. 지금은 녹음기도 있고 영화도 있다. 하지만 책이 가장 모태적 형태가 아닌가 생각한다. 그러나 모든 책이 다 도구는 아니다. 진짜로 잘 만든 책이 도구다.”
-잘 만든 책이란 뭔가.
“사무사(思無邪)다. 생각에 거짓됨이 없어야 한다. 공자의 제자들이 시 300편을 놓고 ‘좋은 시가 무엇이냐’고 물으니 공자는 ‘생각하는 데 사악함이 없는 것’이라 답했다. 인간주의를 바로 세웠으면 좋겠다. 말이 바로 서야 사람도 집안도 나라도 바로 선다.”
-세상을 바꾼 책으론 무엇이 있나.
“세상을 바꾸는 시대정신을 일으킨 책은 여러 가지가 있다. 플루타르크의 『영웅전』, 아우구스티누스의 『참회록』, 다윈의 『종의 기원』과 뉴턴의 만유인력 법칙, 그리고 볼테르·루소 등 계몽주의자들의 책, 루터의 종교 개혁 격문, 정약용의 『목민심서』 등이다. 이 책들은 독자의 마음을 파고들며 시대정신을 만들어낸다. 그 밖에도 마음으로 읽는 책, 즉 ‘심서’(心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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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 스스로 마음에 새기는 책이요, 늘 간직하는 책이다. 나는 국내에 성공회의 뿌리를 내린 세실 쿠퍼(한국명 구세실) 주교가 쓴 ‘사도문’을 늘 간직하고 있다. ‘사람이 호흡을 아니하며 음식을 폐하며 세수를 아니하면 육신의 생명이 능히 보존되지 못함과 같이 사람이 신령한 음식과 청결함을 받지 아니하면 영혼의 성령이 잘 보존될 수 없다. 입으로 먹기만 해서는 안 된다. 머리로 들어가는 음식을 먹지 않으면 인간이 아니다’라는 내용이다. 말씀이란 도구를 제대로 써야 인간이 된다고 했다. 이런 심서를 한 권씩은 간직하고 사는 인생이 아름다운 인생이다.”
-책에서 시대를 본다고 한다. 지난 60년간 책을 만들면서 느낀 시대의 과제는 뭔가.
“남북 분단이 제일 가슴 아프다. (남북이) 서로 싸움만 하는데 싸움의 목적이 없다. 서로 기득권을 지키려는 싸움뿐이다. 또 무슨 말만 하면 빨갱이니, 보수꼴통이니 색안경을 씌우니 말의 자유가 없다. 자유도 무한히 보장될 수 없다는 걸 알지만 적어도 진리만큼은 얘기할 수 있어야 한다. 분단으로 인한 상처를 치유하지 않고 대립만 한다면 100년 후에는 대한민국의 우화가 될 거다.”
-분단의 아픔을 자꾸 얘기하는 계기는.
“박명림 교수(『한국 1950, 전쟁과 평화』), 정병균 교수(『한국전쟁』) 등 전쟁을 겪지 않은 소장 학자들이 노력 끝에 발견한 자료를 모아 책을 냈는데 기가 막힌 책들이다. 너무 가슴 아픈 내용이라 가슴을 치며 생각했다. 한 세기를 뛰어넘어 진보와 보수가, 남과 북이 화해해야 한다. 무조건 화해를 하자는 게 아니다. 어떻게든 용서하고 인간의 기교를 이용해 화해하자는 거다.”
-안중근 도서관을 짓는 데 20억원어치 땅을 내놓아 화제가 됐다.
“파주 헤이리에 카페가 너무 많아졌다. 상업주의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그래서 균형을 유지하게 하려는 뜻이 있다. 더 중요한 이유는 우리 지도자와 국민이 안중근 의사의 거대한 구상을 배워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안 의사를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열혈 청년 정도로만 알고 있다. 하지만 안 의사는 담대한 평화의 비전을 지닌 아시아의 위대한 평화주의자였다. 토지 기증은 아내가 결단을 내려준 데 힘입은 거다. 건축가 조병수씨가 설계를 맡을 예정이다. 진지함이 묻어나도록 건물이 자연 속에 파묻히는 방식으로 지어질 것이다.”
-안 의사의 아시아 평화 구상은 뭔가.
“1910년 일제 법정에서 안 의사가 재판 받은 기록을 보면서 알게 된 것이다. 안 의사는 100년 전인 당시에 놀랄 만한 제안을 한다.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중국 뤼순(旅順)에 한국·중국·일본의 공동 평화회의본부를 둔다. 또 한·중·일 국민이 1원씩 기금을 내 3국 공동으로 은행을 설립한다. 은행 본점은 만주에 두고 경성(서울)·도쿄·베이징에 지점을 설치해 공통 화폐를 사용한다. 그리고 적어도 3국 각국이 2개의 언어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해 서로를 이해하고, 아시아에 평화를 가져오자고 안 의사는 주장했다. 탁월하지 않은가? 그 위대한 목소리가 100년 뒤인 지금 다시 태어나고 있다. 우리 지도자도 국민도 이런 큰 뜻을 가져야 한반도의 미래가 밝아질 것이다.”
-중·장년과 젊은이에게 권하고 싶은 책은.
“중·장년에겐 『행복의 경제학』(헬레나 노르베리호지)이란 책을 권하고 싶다. 당신은 어떤 삶을 살고 있느냐는 질문에 도움이 될 것이다. 젊은이들에겐 마하트마 간디의 자서전과 안중근 의사 전기를 권하고 싶다.”
-집에 책을 많이 갖고 있는 분들이 책을 효과적으로 이용하는 방법은.
“인간이 염을 하듯 책도 염을 해야 한다. 유명 인사들이 한평생 함께해 온 책들을 기념관으로 보내줘야 한다. 마을 단위로 북 카페를 만들어 지적 공동체 문화를 만들어가면 좋겠다. 선진국이 뭐냐 하면, 마을마다 반드시 작은 도서관이 있고 공부하는 국민이 많은 나라다.”
-우리의 독서 현실을 평가하면.
“책을 너무 안 읽는다. 베스트셀러도 너무 편중되고 지적 탐구열이 낮다. 그러기에 사회 쏠림 현상이 큰 것이다. 우리 교육열은 오로지 입시만을 위한 교육열이다. 인간이 되도록 하는 교육열은 너무나 부족하다. 일본은 메이지유신 전후부터 국민적 차원에서 독서운동을 펼쳤다. 그러기에 중국의 쑨원(孫文)·량치차오(梁啓超)가 일본에서 유학했고 우리나라 지식인들도 일본 유학을 많이 했다. 영국 상원의원들이 토론하는 과정을 보면 그들의 지적인 깊이를 알 수가 있다. 책을 읽어야 한다.”
-논술시험조차 외워서 쓰다 보니 젊은이들의 글솜씨가 크게 떨어졌다고 한다.
“논술의 힘은 독서량에서 나온다. 스스로 문장을 통해 사고력을 터득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학교에서 매일 30분이라도 독서시간을 가져야 한다. 낭독도 좋다. 좋은 시 구절 하나라도 낭독하며 들려주는 것이 필요하다. 영국의 패러데이는 가난해 학교를 못 가고 인쇄소에서 일했다. 하지만 거기서 책을 읽은 게 계기가 돼 전기를 발견하고, 위대한 과학자가 되었다. 독서는 백번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다.”
-물질주의에 지친 사람들이 행복한 인생을 찾아 나서면서 ‘힐링’이란 말이 유행한다.
“너무들 힐링에 매달리는 것 같다. 진정한 힐링은 작위적이지 않은 것이다. 현대사회는 겉만 화려할 뿐 풍요가 지나쳐 인간을 속박하고 있다. 절제가 주는 기쁨을 깨달아야 한다. 절제는 인색한 게 아니라 시간을 아끼고 인간을 아끼고 자연을 아끼는 것이다. 남을 죽이는 경쟁이 아니라 서로 보완하는 삶이 중요하다. 프랑스에서 라틀레르라는 수도원에 갔다. 조그만 방에 담요 두 장이 전부였다. 한 장은 깔고 한 장은 덮고 자는 곳이었다. 절제가 주는 자양분을 느낄 수 있었다.”
-출판도시(북 시티)는 왜 만들었나.
“좋은 책을 만들기 위해서다. 물류비를 줄여 비용을 낮춰야 했다. 기획사, 인쇄소, 종이공장이 다 너무 떨어져 있어 비효율이 컸다. 같은 장소에 모여 일하면 책 품질이 좋아지고, 비용은 3분의 1로 줄어든다는 논리로 국가를 설득했다. 처음엔 공무원들이 ‘책이 어떻게 국가산업단지에 오느냐’며 웃었다. 나는 ‘자동차보다도 책이 더 중요하다’고 설득했다.”
-출판단지를 산업단지로 만드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고 들었다.
“5, 6년 넘게 걸렸다. 시작은 노태우정부 때 했는데 워낙 반대가 심했다. 출판단지가 국가산업단지로 승인받도록 사력을 다했다. 결국 김영삼(YS)정부 때 이수성 총리가 국가산업단지로 인정하며 서명했다. 하지만 공무원들이 ‘공장 부지니까 법률에 따라 공장처럼 지어야 한다’고 딴지를 걸었다. 비싸게 짓는다고도 타박했다. 우리는 ‘출판은 지식산업이다. 아름다운 건축물이 있는 도시가 산업효율을 높인다’고 설득해 최종 허가를 받아냈다.”
-건축가들과 ‘위대한 계약’ ‘선한 계약’을 맺었다고 들었다.
“출판인들은 아름다운 건축물을 원했다. 그러자 건축가들은 ‘돈도 없으면서 욕심만 많다’고 했다. 수없이 토론한 끝에 ‘파주에 제대로 된 도시모델 하나 만들어내자’고 의기투합했다. 건축가들은 시세보다 훨씬 싼 가격으로 설계해주고 출판인들은 그 설계도대로 건물을 만들어 건축가들의 뜻을 살려준다는 ‘위대한 계약’을 맺었다. 민현식·조성형 등 건축계 동지들이 우리 뜻을 높이 사 성사된 거다. 이 계약을 바탕으로 천재 건축가인 김석철이 ‘창작과 비평’ 사옥, 승효상이 교보문고 사옥, 영국의 플로리안 베이글이 열화당 사옥, 포르투갈의 알바로 시저가 ‘열린책들’ 사옥을 각각 설계했다. 150채의 건물이 하나하나 아름답게 지어졌다. 서로 조금씩 양보하면 더 큰 게 생긴다는 걸 깨달았다. 영화산업이 들어오는 2단계부터는 ‘위대한 계약’을 더욱 선한 마음으로 이어가자는 뜻에서 ‘선한 계약’으로 개명했다.”
-건축가들이 제대로 된 건물을 지어볼 기회가 되었겠다.
“건축가들이 순전히 자신들의 뜻대로 건물을 설계하고 지을 기회였다. 그러나 그들의 경제적 희생이 컸다. 이 과정에서 많은 실험을 하며 알게 된 건데, 국가가 건축가들에게 창의적인 설계를 할 기회를 많이 줘야 한다. 아름다운 건축물이 있는 곳이 세계적인 관광지이고 선진국이다.”
-지금 북 시티는 어떤가.
“파주 북 시티는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시도였다. 출판인들이 협동조합을 만들고 건축가들과 함께 ‘건축시민운동’을 한 결과다. 1단계는 출판과 인쇄 기업이 들어 왔다. 한길사·창비·김영사 등 300곳이다. 2단계는 영화계다. 『건축학 개론』을 제작한 명필름, 특수효과로 유명한 영상기술업체 ‘데몰리션’ 등 34개 회사가 입주했다. 이어서 쇼핑센터와 갤러리·병원 등이 들어왔다. 서점도 들어서고 있다. 단지 내 종사자가 1만 명에 달한다.”
-다음 단계로 꿈꾸는 건 뭔가.
“책과 쌀과 사람 농사를 한꺼번에 하는 ‘북팜시티(Book Farm City)’를 세우는 거다. 인간이 힐링을 원하는 건 자연 속으로 돌아가려는 본능과 같다. 북팜시티엔 농촌에 맞는 수퍼마켓이나 병원도 들어선다. 여기서 나오는 생산품은 고유한 브랜드로 보장받는다. 고양(일산)에 위치한 절대농지 330만㎡(100만 평)가 후보지다. 지도자의 결단만 있으면 파주에서 고양(일산)까지 거대한 생태지식산업의 메카가 탄생할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에게 부탁하고 싶은 건.
“박 대통령은 창조경제나 문화 융성 같은 새로운 언어를 쓰려고 한다. 거대한 형식의 깃발은 올렸지만 형식을 채울 내용을 하나하나 만들어가야 한다. 그 노력은 아주 구체적이어야 한다. 결국은 박 대통령 밑에 있는 전문가·기술자들이 일해야 하는 거다. 박 대통령이 능력 있는 인재를 구하느냐에 성패가 달렸다. 인재 등용은 정파를 초월해야 한다. 아직은 정권 초창기라 섣불리 희망을 품지도 절망하지도 않으면서 박 대통령을 후원하는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다. 지식문화산업인 출판과 영화, 나아가 북팜시티에 관심과 애정을 가져달라고 부탁하고 싶다. 무엇보다 국가의 미래를 열어나갈 새로운 도시설계와 디자인을 구상하라고 권하고 싶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그 질문을 들으니 갑자기 슬퍼진다. 건강할 땐 슬픔을 못 느낀다. 약간 아프고 괴로울 때 슬픔을 크게 느낀다. 반면 갑자기 일이 잘 풀릴 땐 기쁘다. 그 기쁨과 슬픔 사이에서 냉철함을 유지하는 존재가 인간인 듯하다. 이성을 가졌을 때 인간다운 것 같다. 인간은 부족함을 느낄 때 그 부족함의 완성을 향해 철학적으로 사색하고, 더 노력하고, 더 깊은 걸 터득한다. 그리하여 죽음을 죽음답게 마치는 거다. 다음 세대에 떳떳하게 인생을 마칠 수 있을 때가 (인생의) 가장 좋은 경지가 아닌가 생각한다.”
이광재 노무현 전 대통령의 국회의원 시절 그의 보좌관으로 정계에 입문해 17, 18대 국회의원과 강원도지사(2010~2011년)를 지냈다. 노무현 정부에서 청와대 국정상황실장을 역임했다. 1965년생(48세)으로 원주고와 연세대 법대를 졸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