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문제연구원은
세계의 주요 지역 및 국가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 관한 종합적 학술연구를 통해
연세 교육의 국제화에 기여하고 우리 학계의 위상을 국제사회에 고양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
1972년 3월 23일 연세대학교 교책 연구원으로 설립되었다.
1970년대 | 연구원 조직 및 학술연구의 기초를 구축하고 선진국 연구에 중점을 두었다. |
---|---|
1980년대 | 세미나 및 포럼의 정례화를 통해 질적 심화를 기하는 한편 동구를 비롯한 사회주의권 연구를 활성화 하였다. |
1990년대 | 국가 및 지역연구에 더하여 주제별 연구활동을 활성화하였다. 지역연구와는 별도로 학제간 연구 방법을 통해 세계의 주요 쟁점들에 관한 연구를 강화하였다. 특히, 연구활동과 교육의 연계성을 강화 하는 차원에서 1997년 연구원 산하에 석사학위과정인 '지역학협동과정'을 신설하였다. |
2000년대 | 새로운 세기를 시작하여 연구의 현실성 강화 차원에서 정책개발 중심의 포럼과 세미나 개최에 역점을 두고 정부의 제 정책에 대한 대안을 마련하려는 목표를 강화하였다. |
2010년대 | 지역연구의 강화와 융복합적인 학문 연구, 새로운 연구 과제의 개발을 통한 'Global Hub of Area Studies'으로의 도약을 위한 다양한 학술 연구 및 교육 방안을 모색하고자 한다. |
연세대학교 동서문제연구원은 1972년 3월 23일 설립되었다. 동서문제연구원이 설립된 1970년대 초반은 동서 두 진영의 극단적 이념대결이 지양되고 상호신뢰를 바탕으로 한 화해를 모색하던 데탕트의 시기였다. 1970년 2 월 닉슨(Nixon) 대통령은 국회에 보낸 외교교서를 통해 아시아에서 미국이 점진적으로 철수한다는 것을 골자로 하는 새로운 대 아시아정책인 닉슨-독트린(Nixon Doctrine)을 제시했다. 미국은 월남전의 종결을 위해 종래의 정책을 단계적으로 수정할 의사가 있다는 점을 밝히면서,향후 아시아 국가 들은 자주적 노력으로 자국의 안보를 해결함으로써 미국의 부담을 줄여줄 것과 미국은 중국과의 접촉범위를 넓혀 미 · 중 관계의 정상화를 시도하겠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다. 그리고 미국은 이에 따른 후속조치로서 1971년 7월 15일 닉슨 대통령의 중국방문계획을 발표했고, 1972년 2월 닉슨의 역사적인 중국방문이 실현됨으로써 동서해빙의 물꼬가 트이기 시작했다. 1970년대 벽두부터 시작된 국제적인 동서해빙의 물꼬가 한반도의 긴장 완화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남북한 당사자들로서는 미국과 중국의 접근으로 가시화된 아시아에서의 긴장완화를 사실로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고, 그 결과 1970년부터 1972년 사이에는 남북한 간의 활발한 접촉을 통한 화해의 움직임이 진행되었다. 그 결과 1972년 7월에 7 · 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었고,8월에는 남북적십자회담의 첫 번째 본 회담이 평양 에서 열렸으며,9월에는 제2차 본 회담이 서울에서 열렸다. 이어서 12월에는 남북조절위원회 공동위원장 제1차 회담이 판문점「자유의 집」에서 개최되었다.
그러나 1970년대 초의 동서해빙 물결이 한반도의 긴장완화에 긍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국제적인 동서 데탕트는 남북한 당사자들로 하여금 남북한 간의 적극적인 대화와 긴장완화의 불가피성을 환기 시켜 주었지만,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의 극적인 변화는 오히려 체제의 경직성을 강화시키는 구실을 제공해 주었다. 미국의 중국에 대한 접근은 국제정세의 변화에 대한 불확실성과 위기감을 가중시켰고, 남한의 입장에서도 미국의 급작스러운 주한미군 철수는 한반도의 안보에 대한 위기의식을 고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즉 이 시기는 국제적으로 동서 데탕트에 따른 해빙의 분위기가 고조되는 가운데 국내적으로는 오히려 안보에 대한 위기의식이 증폭되고 있었고,1972년 10월 17일 박정희 대통령은 특별선언을 발표하여 국회를 해산하고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기회와 위기가 극적으로 교차되던 1972년의 상황은 우리 사회에 진통과 시련을 안겨 주었고, 대학사회에도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계엄사는 포고 1호로 신문 · 통신의 사전 검열제를 실시했고, 대학가에도 휴교령이 선포되었다. 남북회담에 걸었던 국민적 열망은 순식간에 무너졌고, 사회 전체에 침울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게다가 이러한 상황에서 확정 · 공포된 유신헌법은 진리와 자유에 대한 정당한 외침을 질식시키고 침묵만을 강요했다.
동서문제연구원의 창설은 전환기적 시대상황의 한 복판에서 맞이한 기회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이에 대한 바람직한 대안을 찾아내려는 진지한 학문적 노력의 결실이었다. 대외적으로는 국제정치 · 외교 · 경제 · 사회 · 문화 등의 각 방면에서 동서간의 접근과 화해의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었고,따라서 세계의 주요 지역과 국가들에 대한 학술적 연구와 이해의 필요성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상황이었다. 대내적으로는 모처럼 조성된 남북한간의 화해분위기가 실질적인 결실을 맺을 수 있기를 온 국민이 여망하고 있었다. 또한 한국이 이룩한 경제적 발전과 성장이 사회전체의 균형을 이루면서 조화로운 발전을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보다 심층적인 연구가 필요했다.
그러나 당시의 한국상황에서 국제정세의 급격한 변화에 부응하여 학술적인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효과적인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종합적인 학술연구기관을 대학 내에 설치한다는 것은 기대하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1972년 당시 연세대학교 내에도 20여 개의 연구소가 설치되어 있기는 했지만,대부분의 연구소들은 외형상의 체제도 갖추지 못한 채 설립이래 거의 아무런 연구성과도 거두지 못한 유명무실의 연구소들이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당시 한국사회에서 일반적인 사회현상으로 만연되어 있던 1인 1연구소의 풍조가 대학 안에서도 답습되고 있던 실정이었다. 특히 1972년 당시 연세대학교는 연간 약 1억 원에 가까운 국내외의 연구비를 투자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연세대학교 내에 설치된 20여 개 연구소들이 제출한 연구성과는 결코 만족스럽지 못한 것이었다. 따라서 범연세적 학술연구기관으로 발족될 동서문제연구원은 연세대학교 안에 설립되어 있는 연구소들의 고질적 문제점을 타개하고 전폭적인 정비와 강력한 강화책을 마련하여 새로운 연구체제로 출범해야 한다는 소명을 띠고 있었다.
1970년대의 급격한 국내외 정세변화에 대한 학문적 대응의 필요성은 1972년 박대선 당시 총장에 의해 제기되었다. 박대선 총장은 1972년 신년사에서 새로운 교육구상의 하나로 세계적인 동서화해의 기류에 부응하는 범연세적인 학술연구기관의 설립을 제안했다. 박대선 총장의 신년사에 따르면,연세대학교는 동서문화의 비교연구를 위한 새로운 연구기관 발족을 구상하고 있으며, 주로 인문과학과 사회과학의 학제적 연구를 통해 한국문화의 세계문화에 대한 공헌과 세계적인 학문의 우리 학문발전에 기여할 방안을 모색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새로 설립될 학술연구기관의 연구활동을 통해 세계문제를 우리의 역량으로 해결하는 한편 그 결과가 우리의 문제 해결에 기여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전환기적 시대 상황에 대한 학문적 대응의 필요성은 당시 본교의 많은 교수들 사이에서 이미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고,그 결과 마침내 범연세 차원의 교책연구원이 설립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80여 년 역사의 연세대학교가 추구한 자유와 진리를 향한 유구한 전통, 즉 구한말에는 개화문명을 수용하는 선봉이었고,일제의 식민치하에서는 조국광복을 위한 항일투쟁에서 선구자적인 역할을 했으며, 해방 이후에는 자유와 정의의 기치아래 조국의 민주화와 근대화에 매진해온 연세의 전통이 1970년대의 시대정신인 평화공존과 상호번영이라는 세계사적 흐름과 평화와 번영 속의 조국통일이라는 민족사적 흐름 속에서 새롭게 구현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대학의 국가와 사회에 대한 공헌은 대학 내 연구기관들의 연구결과에 의해 평가된다. 대학의 연구결과는 곧 그 대학의 학문적 수준을 평가하는 척도이기도 하지만, 그 연구결과는 국가발전의 초석이기도 하다. 이 점에서 대학의 일차적 사명은 학문의 연구에 있으며,대학의 모든 역량은 연구 활동에 집중적으로 투여되어야 한다. 따라서 1972년 박대선 총장이 신년사를 통해 연세대학교를 연구중심의 대학으로 육성하기 위해 연구소 중심의 연구를 권장하고 연구소의 효율적인 운영으로 학문연구의 수준을 향상시키겠다는 의지에 걸었던 기대는 그 어느 때보다 각별한 것이다. 특히 관심을 불러일으켰던 것은 새로운 연구소가 연세 학문공동체의 토대가 될 수 있는 범연세적 학술연구기관으로 출범할 것이라는 점에 대한 기대였다. 즉 범 연세적 학술연구기관으로 출범할 동서문제연구원은 기존의 연구소들과 달리 합리적인 운영을 통해 연세 학문공동체의 모든 구성원들이 적극적인 참여의식을 갖고 그들의 모든 학문적 역량을 총체적으로 집중시킬 수 있도록 명실상부한 새로운 체제를 갖추어 줄 것을 요구했던 것이다.
이러한 범 연세 차원의 기대에 부응하여 새로 설립된 동서문제연구원은 기존의 연구소들과는 달리 학제적 연구를 표방하면서 연세의 모든 학문적 역량을 결집시키고자 노력했다. 특히 동서문제연구원은 출범 초기부터 경영대학원과 행정대학원을 주축으로 공동연구를 시도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동서문제연구원이 시도한 학제적 연구는 이제까지 개인의 능력에만 주로 의지하여 왔던 연구 관행을 벗어나려는 새로운 시도였으며,세계의 주요 국가와 지역에 대한 종합적 학술연구는 분과 학문에만 안주하던 학계의 타성에 경종을 울리는 참신한 문제제기였다.
동서문제연구원은 연세학교의 오랜 역사와 전통 속에 축적된 학문적인 저력을 바탕으로 설립된 범 연세적인 학술연구기관이다. 이와 관련하여 1972년 3월 16일 당시 박대선 총장은『연세춘추』와의 인터뷰에서 “인문 · 사회과학을 통하여 동서문화의 비교종합연구를 위해 동서문제연구원을 설립 · 개원한다”고 밝혔다. 특히 박대선 총장은 새로 설립될 동서문제연구원이 정치,경제,사회,인구,문화면에 걸쳐 세계의 주요 지역별 학술연구를 종합적으로 수행함으로써 우리나라 정치, 경제, 사회의 지향할 발전방향 모색과 인류 평화 번영에 공헌하게 될 것이라면서,동서문제연구원을 “빛나는 80년의 역사와 전통 속에 쌓아온 연세의 지성과 총기를 다 모은 범연세적인 학술연구기관”으로 육성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격동하는 국제정세 및 학문분야 전반이 급속히 변천하고 있는 상황에서 분절적으로 수행되어 왔던 기존의 연구들을 종합하고 세분화된 전문 분야들 사이의 자료 교환 및 연구제휴를 시도함으로써 한국의 국제적 위상을 재확인하고 한국이 지향해야 할 바람직한 진로를 제시하기 위해 동서문제연구원을 설립하게 된 것이다.
동서문제연구원이 창설 당시에 제시한 설립목적은 세계 주요지역 및 국가의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에 관한 학술연구를 종합적으로 수행함으로써 한국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색하고,나아가 국제사회에서의 상호협력과 인류의 평화 · 번영에 공헌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설립목적의 실질적인 수행을 위해 동서문제연구원은 설립 초기부터 범세계적인 수준에서의 연구와 모든 학술 분야의 유기적인 협력을 지향했다. 이에 따라 박대선 당시 총장이 초대 원장을 겸직하고 상경대 한기춘 교수가 부원장으로 임명된 동서문제연구원은 설립단계에서 이미 7개의 지역별 연구 부서(국내문제연구부, 북한 및 공산권연구부, 일본연구부, 동남아연구부, 유럽연구부, 미주연구부, 중동 및 아프리카연구부)를 두고 인접학문간의 학제적 연구를 수행하고자 시도했으며,이들 7개의 지역별 연구 부서를 중심으로 동서문제연구원이 표방한 설립목적에 부합되는 연구프로젝트를 개발함으로써 연세의 학문적 역량을 높이는데 기여하고자 했다.
당시 동서문제연구원이 제시한 연구프로젝트의 추진방향은
(1) 한국의 역사적 전통에 대한 학문적 재조명을 통해 정치 · 경제 · 사회 등의 사회과학분야에서 이론의 한국화를 시도하며
(2) 개화기이래 도입된 서구의 문명을 주체적 관점에서 재평가하여 자주적인 민족문화의 중흥에 기여하며
(3)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등의 여러 각도에서 북한 및 공산권을 종합적으로 연구하여 통일과업의 달성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연구 · 모색하며
(4) 정치 · 외교 · 문화 등의 전반에 걸쳐 동서 두 진영의 체제와 제도를 비교하며
(5) 경제 · 무역의 측면에서 선진국과 후진국 사이의 발전과 저발전 문제, 이른바 ‘남북문제’를 분석한다는 것이었다.
즉, 동서문제연구원이 추진할 연구프로젝트의 방향은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등 각 방면에서 범세계적으로 쟁점이 되고 있는 문제들을 학제적으로 조명하고, 그것을 한국적 관점에서 분석하여 사회과학 제 분야의 한국적 이론화를 시도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동서문제연구원은 설립 초기에 표방한 이러한 연구활동과 연구프로젝트들을 장 · 단기 과제로 구분하여 체계적으로 추진하고자 했다.
동서문제연구원이 설립초기에 표방한 주요 활동의 내용은
동서문제연구원은 설립초기부터 이러한 연구활동을 통해 세계 각지의 학자 및 전문가들이 협력하며 연세대학교의 교수진과 교외의 전문가 및 학자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범세계적 수준에서의 학술연구를 지향했으며, 세계 주요 국가 및 지역에 대한 지역별 연구와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른 주요 문제영역에 대한 영역별 연구를 학제적으로 수행할 것을 표방했다. 특히 동서문제연구원이 범세계적 수준의 학제적 연구를 수행하는데 있어서 그 연구활동의 기본적인 방향으로 제시했던 것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1) 냉전의 구조를 이해하고 냉전의 해소와 인류의 평화적 번영에 기여하기 위해서는 동서문제의 비교연구를 통하여 동서간의 지적교류와 상호이해 및 협력을 증진시키며,
(2) 공산권과 비 공산권의 체제와 제도를 비교하고 세계의 주요 지역과 국가에 대한 지역연구를 통하여 현재의 국제사회가 안고 있는 현안들을 해결하는데 기여하고,
(3)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등에 관한 여러 학문 분야들 사이의 협동연구를 발전시켜 새로운 이론을 모색하고 정책대안을 개발한다는 것이었다.
<출처 : 동서문제연구원 30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