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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의 음악학자이면서 최근엔 소설도 쓰고 있다. 왜 음악을 하고 글을 쓰는가.
“감동을 주기 때문에 좋아한다, 아니 사랑한다. 일상에서 조그만 일이라도 감동을 느끼는 그 순간이 정말 사는 것 같다. 슈베르트는 나를 울린다. 교직에서 은퇴한 지금 소설을 쓰고 있는데 어느 순간 머리를 스치는 단어나 문장을 기록하는 순간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든다.”
-우리나라가 ‘경제국가이자 문화국가’가 돼야 한다고 강조해 왔다.
“사람은 몸과 마음이 양대 기둥이다. 몸이 먹고사는 데는 경제가 기초다. 마음이 먹고사는 것은 교육과 문화, 예술이 제공한다. 몸과 마음은 따로 노는 것이 아니다. 그 때문에 경제국가와 문화국가가 함께 가야 한다. 또 몸이 삶의 목적이 아니라 마음이 삶의 목적이라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한예종의 기적’을 만들었다. 어려움이 많았을 텐데.
“‘예술학교 설치령’ 하나만 갖고 서울대 교수직을 버린 채 총장을 맡았다. 피아노 한 대 없이 시작했다. 예산이 없어 천재지변 발생 시 쓰이는 예비비를 억지로 받아내 문을 열었다. 살인적인 인내를 했다. 김동호 전 문화부 차관이 많이 도와줬다.”
-한예종 출신들이 세계 콩쿠르를 휩쓸고 예술교육의 새 역사를 만들고 있다. 성공요인은.
“교육 원리에다 예술 원리를 가미했기 때문이다. 현재 교단을 지배하는 ‘교육 원리’만 갖고 학교를 운영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다행히 교육부가 문화부에 한예종을 일임했고, 문화부는 내게 교수 채용권·운영권 등 전권을 줬다. 기존 교육 시스템으로 했다면 오늘날 세계적인 예술학교 한예종은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교수 채용 과정에서 한예종이 달랐던 점은.
“박사 학위 없어도 인재라면 채용했다. 첼리스트 정명화, 피아니스트 이경수를 교수로 임명했다. 처음엔 반발이 극심했지만 돌파했다. 기대에 어긋나지 않았다. 그분들은 훌륭한 교수로 맹활약했다. 서울대 교수직을 버리고 과감히 합류한 이건용·김남윤 교수의 열정도 학교를 빛나게 했다.”
-학생 선발은 어떻게 했나.
“진짜 학생들을 뽑겠다는 열정으로 했다. 입시 부정을 없애기 위해 심사위원을 전부 외국인으로 했다. 정원이 133명이었지만 절대평가제를 도입해 100명 아래로 뽑았다. 수능 성적 대신 예술적 재능만 보고 뽑았다. 의미 있는 인재들을 선발하기 위해서였다.”
-교수가 학생들을 가르친 방식은.
“레슨은 무제한으로 했다. 교수들이 한 차례 레슨을 한 시간부터 30시간까지 자유자재로 했다. 강충모·김대진 교수는 매일 레슨을 했다. 그 결과 손열음·김성욱·김현수 등 국제적인 피아니스트가 나왔다. 음악에 이어 연극·영상·무용·전통예술 등 분야별로 6년 만에 6개의 분과가 만들어졌다. 교수들과 서로 껴안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한예종의 장래는 어떻게 가나.
“연주 분야에서는 국제경쟁력이 확보됐지만 작곡에선 세계적 인재가 나오지 않고 있다. 이렇게 창의·창작 분야가 뒤떨어진 건 우리 사회 전 분야에 창의력이 부족한 게 한 원인일 거다.”
-창의력 있는 인재를 키우려면 아동기 교육이 중요하다는데.
“맞다. 음악은 생후 9개월 만에 소질이 결정된다는 말이 있다. 어릴 때부터 공부하는 커리큘럼이 달라야 한다. ‘아동 중심 교육’을 교과에 넣어야 한다. 선생이 아이의 DNA를 찾아내야 한다. 그런 능력과 사명감을 가진 선생이 우대받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암기 위주의 교육은 교육의 살인자가 되기 쉽다.”
-학생 중심의 교사 시스템을 강조하는 듯하다.
“수능 음악 시험을 보니 나도 못 푸는 문제가 나오더라. 선생이 주인이 아니라 학생이 주인이 돼야 한다. 쌍둥이를 낳아도 한 아이는 창가에서 하늘과 별과 비를 볼 수 있고, 한 아이는 벽만 보고 자란다. 아이들에겐 부모가 모르는 변수가 얼마든지 있다. 유럽처럼 유아·아동 교육에 최고의 교사가 배치돼야 한다.”
-교육 개혁에는 제도가 중요하다고 강조해 왔다.
“개혁은 말로 탄생하지 않는다. 더럽더라도 현실에 기반한다. 그래서 정치가 중요하고 리더가 중요하다. 한예종도 ‘한국예술종합학교 설치령’이라는 제도가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앞으로 ‘예술교육법’을 제정해 교육법이 예술교육의 모든 것을 간섭하는 현상을 없애야 한다.”
-박근혜 대통령에게 주문하고 싶은 게 있다면.
“한예종 제2캠퍼스를 만들어야 한다. 한예종은 현재 서울 석관동에 4개, 예술의 전당에 2개로 나뉘어 있는데 이를 하나로 묶어야 한다. 정부가 결단을 내려야 한다.”
-‘피벗 코드(Pivot Chord)’ 사회를 만들자고 주장해 왔는데.
“음악에서 서로 다른 두 조(調)에 공통으로 존재하는 화음을 피벗 코드라고 한다. G코드는 C장조에서는 속음이지만 G장조에선 주된 음이다. C장조와 G장조 중간지점에 공존하는 G코드 때문에 하나의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바꿔지는 전조현상이 일어난다. 우리 사회에도 갈라진 보수와 진보, 남과 북, 동과 서, 빈과 부를 연결하는 ‘피벗 코드’가 있어야 진화가 가능하다. 베토벤도 보수적인 사람이었지만 기존의 틀을 깨고 낭만주의의 선구자가 됐다. 민생도 중요하지만 몸과 마음을 더불어 먹여 살리는 지도자가 나와야 한다.”
-KBS 교향악단 총감독에서 한예종 총장, 소설가까지 다양한 삶을 살았다.
“열심히 했다. 무엇을 하든 다 좋았다. 근데 중독이 될 정도로 좀 더 열심히 할걸 하는 반성이 든다. 누군가는 미쳐서 일을 해야 세상이 바뀐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인생은 크레셴도(crescendo·점점 크게)와 디크레셴도(점점 작게)가 있다. 크레셴도와 디크레셴도가 자주 교차하는 게 좋은 인생 같다. 즉 인생엔 정착과 방황이 있는데 너무 쉽게 정착해도, 너무 많이 방황해도 안 된다는 거다. 방황할 만큼 방황하고, 정착할 만큼 정착하는 게 인생이다. 자신의 삶의 길을 발견해 태어난 보람을 느끼고 자신 때문에 사회도 득을 보는 일이 있다면 멋진 인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