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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6주년 기획 이광재가 원로에게 묻다 ⑬ 가야금 명인 황병기 이화여대 명예교수 - 이광재 객원교수 (20130908. 중앙sun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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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12-23 00:00:00

 

“60년간 하루도 안 거르고 가야금 공부 … 대가 되는 길은 연습 또 연습”

창간 6주년 기획 이광재가 원로에게 묻다 ⑬ 가야금 명인 황병기 이화여대 명예교수

대담·글=이광재 객원 칼럼니스트·전 강원도지사 | 제339호 | 20130908 입력
그의 가야금 선율에 맞춰 비보이들이 힙합 춤을 추었다. 국립발레단도 그의 선율을 타고 춤사위를 뿜어냈다(‘아름다운 조우’). 프랑스 파리오페라발레단 출신 니콜라 폴도 그의 ‘비단길’을 바탕으로 ‘노바디 온 더 로드(Nobody on the road)’란 작품을 만들었다. 60년 세월이 축적된 그의 음악은 국악과 서양음악·현대음악은 물론 팝·재즈·댄스뮤직까지 포용하며 모든 경계를 허문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가야금 명인 황병기(77·사진) 이화여대 명예교수의 전율적인 매력이다.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의 ‘내란음모’ 의혹 사건으로 온 나라가 시끄러운 시점에서 농밀한 선율로 예술 간 경계를 허물고 만물일체의 탐미세계를 구축한 황 명예교수를 만났다. 그는 “기마민족 특유의 우수한 유전자에도 불구하고 한국인의 창의력이 떨어지는 건 잘못된 교육체제에 원인이 있다”며 “학생들의 기를 살려주는 쪽으로 시스템을 뜯어고쳐야 한다”고 역설했다.
 

황병기 국내 최고의 가야금 연주자이자 국악 작곡가. 1936년생. 중학교 3학년(1951년) 때 하굣길에서 우연히 김철옥 선생의 가야금 연주를 듣고 그 때부터 국립국악원에서 가야금을 배웠다. 정악의 명인 김영윤과 산조의 명인 김윤덕을 사사했다. 경기고,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는 동안에도 가야금을 놓지 않았다. 1962년 미당 서정주의 시에 곡을 붙인 ‘국화 옆에서’를 선보이며 가야금 연주자로 첫 발을 내디뎠다. 같은 해 한국 최초의 가야금 현대곡인 ‘숲’을 만들었다. 65년 미국 하와이에서 열린 ‘20세기 음악예술제’에 동양의 대표 작곡가로 초청돼 호평을 받은 후 미국에서 음반이 발매되고 언론의 격찬을 받았다. 이화여대 한국음악과 교수, 미국 하버드대 객원교수를 거쳐 현재 이화여대 명예교수 및 대한민국예술원 부회장, 한국국악학회 고문을 맡고 있다. 1990년 평양 범민족통일음악회 남측 대표, 서울송년음악회 집행위원장, 1995 국악의 해 조직위원장을 맡았다. 대표곡으로 ‘침향무’(1974), ‘미궁’(1975) 등이 꼽힌다. 대한민국국악상(1965), 은관문화훈장(2003), 대한민국예술원상(2006) 등을 수상했다.

 
-왜 예술을 하나.
“내가 좋아서 하는 것이다. 1999년 대장암 판정이 떨어져 큰 수술을 받았다. ‘수술 중 죽어도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서약을 한 뒤 수술을 받았다. 제일 고통스럽고 어찌 보면 비참한 시간들이 흘러갔다. 입원실에 있는데 멀리 시계탑이 보였다. 그 순간 ‘인생에서 가장 비참한 지금, 가장 아름다운 곡을 만들고 싶다’는 열망이 불타올랐다. 내 인생과 예술의 관계는 이렇게 숙명적인 것 아닐까 싶다.”

-음악에서 일가를 이뤘는데 부모님이 예술을 했나.
“전혀 아니다. 아버님은 예술을 제일 싫어하셨다. 특히 소리를 싫어하셔서 아버님이 집에 오시면 라디오도 껐다. 평생 휘파람 한 번 부시는 걸 본 적이 없다. 일생 영화 구경이 세 번, 그것도 중도에 극장을 나오셨다. 주로 한문으로 된 중국 소설을 즐겨 보셨을 뿐이다.”

-예술가에게 천부적인 재질과 노력 중 무엇이 중요한가.
“글쎄다. 내가 서울 종로구 재동초등학교를 다녔다. 당시는 방과후에 예·체능을 집중적으로 가르쳤다. 나는 풍금 소리를 좋아했고 줄곧 음악반 활동을 했다. 그 결과 음악 성적이 월등히 좋았다. 어렸을 적에는 괴짜이고 문제아란 이야길 주로 들었다. 중3 때 6·25 부산 피란 시절에 가야금을 만나면서 음악인의 삶이 시작됐다.”

-피란 시절에 가야금을 만나다니 특이하다.
“모범생이었던 반장이 가야금을 배우자고 해서 ‘김동민 고전 무용연구소’란 곳을 찾아갔다. 그곳에서 셋방살이하던 김철옥 노인을 통해 가야금을 만났다. 지금도 잊지 못할 아름다운 소리였다. 영혼이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어 가야금을 배우기 시작했다. 피란 국회가 부산 용두산에 세운 국립국악원을 거쳐 서울 수복 뒤엔 지금의 비원 앞으로 이사한 국립국악원에서 하루도 거르지 않고 가야금 연습을 했다. 반장 친구는 부모의 반대로 가야금을 접었다. 인생이란 자신이 좋아하는 걸 하다 보면 길이 생기는 것 같다.”

-부모님이 가야금 배우는 데 대해 반대하지 않았나.
“반대가 심했다. 그래서 ‘아인슈타인도 바이올린을 했다. 가야금을 배우게 해주시면 공부를 더 열심히 하겠다’고 설득했다. 그만큼 가야금이 좋았다. 경기고, 서울대 법대를 다닐 때는 물론 졸업 후 사업가, 교수를 지내며 60년이 흐른 지금까지 하루도 거르지 않고 가야금 연습을 해왔다.”

-노력을 중요시하는 듯하다.
“음악의 꽃은 역시 연주다. 연주는 육체 행위다. 육체는 매우 정직한 것이다. 정신은 속임수가 가능하지만 육체는 속임수가 불가능하다. 훈련이 중요하다. 김연아 선수는 1주일에 6일, 하루 6시간씩 연습했다고 한다. 천하의 김 선수도 아마 몇 달 연습을 쉬면 얼음판에 넘어질 것이다. 가야금은 한 달만 쉬면 손가락에 물집도 잡히고 근육이 풀려 연주를 못한다. 대가(大家)가 된다는 건 연습의 연속이다.”

-대가가 되려면 천부적인 재질과 노력 외에 무엇이 필요한가.
“환경이다. 천재는 사회가 만들어낸다. 만약 베토벤이 조선시대 제주도에서 태어났다면 월광 소나타, 운명 교향곡을 만들지 못했을 것이다. 왜? 피아노가 없었으니까. 베토벤이 악성이 된 건 그 시대 사회와 문화, 기술에 힘입은 것이다.”

-서울대 법대 출신으로 가야금 대가가 됐다. 미술계에 족적을 남긴 이대원 전 홍익대 총장도 경성제대 법대 출신이고 첼리스트 장한나도 하버드대 철학과 졸업생이다.
“예술처럼 창의적인 분야는 학교에서 배우는 것을 뛰어넘는 게 많다. 김소월 시인은 시작법(詩作法)을 배운 적이 없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봄의 제전’을 작곡한 스트라빈스키는 상트페테르부르크대 법대 출신이다. 그는 음악 선생을 둔 적이 없다. 현대음악의 거성 쇤베르크역시 음악학교 문턱도 가지 않았다. 특히 작곡 분야는 더욱 창의성을 요한다. 나 역시 전례도 없고, 선배도 선생도 없는 가운데 62년에 현대가야금 창작곡 1호인 ‘숲’을 만들었다.”

-전공보다는 소질이 중요한 것인가.
“우리 역대 대통령 가운데 정치학과를 나온 분이 몇 명인가? 거의 없다. 재계의 이병철정주영구자경 회장 가운데 상과대학을 나온 분이 있는가. 공부해서 일가를 이룬 분들이 아니다. 창의력으로 일가를 이룬 분들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왜 창의력이 부족하다는 얘기가 나오나.
“음악 분야만 놓고 얘기한다면, 기교가 중요한 연주에선 한국이 세계 콩쿠르를 휩쓴다. 그런데 작곡 분야에선 많이 뒤떨어진다. 우리 사회 모든 분야에서 창의력이 떨어진다. 이미 만든 것을 모방하는 데는 강한데 시대를 선도하는 창의력은 약한 것이다. 그 이유는 잘못된 교육에 있다. 주입식 교육이 문제다. 틀에 박힌 교육을 한다. 미국이 문제가 많은 나라처럼 보이지만 창의력 교육은 매우 훌륭하다. 학생이 좋아하는 일을 발견하게 해주고, 그것을 잘할 수 있도록 키워주기 때문이다. 우리도 그래야 한다. 미래창조과학부를 만들었는데, 거기도 창의적 인재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기마민족이고, 창의력 있는 유전자를 갖고 있다. 교육이 문제다. 변화가 와야 한다.”

-우리 민족의 창의력이라면.
“백남준을 보자. 거부의 아들이었는데 다섯 살 때 바지를 사주었더니 무릎 부분을 가위로 잘라 입고 다녔다고 한다. 패션에서 50년을 앞서간 거다. 그는 젊은 나이에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대상을 받았고 비디오 아트라는 새 장르를 열었다. 비디오 아트는 오늘날 유튜브 아닌가? 또 백남준은 우리 민족이 기마민족이라고 했는데 싸이가 말춤으로 그 유전자를 예술화했다. 또 그 말춤은 백남준이 원조인 유튜브를 통해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이렇게 백남준과 싸이의 만남은 우발적이긴 하지만 한국인의 저력을 말해 주는 것이다. 둘을 연결하면 더 큰 에너지를 만들어낼 수 있다.”

-본인도 천재 소리를 듣지만 네 자녀도 모두 공부를 잘했다.
“4명 모두 공부를 잘했다. 그중 한 아이는 서울대와 하버드대를 나와 고등수학원을 다녔다. 유독 수학을 좋아해 하버드대 유학 시절 추수감사절에 학교 전체가 문을 닫았는데도 열쇠를 얻어 종일 홀로 공부했다. 동료 하버드대생들이 아들을 보고 질려 했다고 한다. 결국 자기가 좋아하는 걸 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 아이들 교육 비결은 없다. ‘공부하라’는 얘기를 한 적이 없다. 집안이 책 읽는 분위기가 되는 게 중요하다. 무엇보다 부모가 솔선수범해야 한다.”

-노력을 강조하는데 창작은 어떻게 하나.
“마음속으로 2년 정도 구상하고, 작곡을 시작하면 2주 정도에 걸쳐 집중한다. 시작하면 거의 식음을 전폐한다. 서양이나 전통 흉내 안 내기, 자기 모방 안 하기를 원칙으로 세우고 집중한다. 작품마다 새로운 자기 세계를 창조하려고 노력했다. 60년 동안 창작집 5개를 냈다. 과작이지만 대중이 외면한 적은 없었다.”

-‘침향무’ ‘비단길’ 같은 작품들이 대부분 슬픈 느낌을 주는데.
“모든 예술에서 감정의 바탕은 슬픔이다. 가장 기쁜 순간, 예를 들어 올림픽에서 금메달 딸 때나 이산가족이 상봉할 때를 보면 울지 않는가? 그게 최고의 기쁨이다. 나는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 파르티타 2번 ‘샤콘’(chaconne)을 들으면 지금도 눈물이 난다. 채플린의 희극도 깊이 들여다보면 슬프지 않은가?”

-전통이 이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옛날 것이 오늘날 다시 창조적으로 전해져야 골동품이 되지 않고 전통이 된다. 요즘 국악도 퓨전이 대세인데 후배 음악인들에게 ‘좋다. 마음대로 하라’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퓨전은 안 한다. 퓨전을 싫어한다. 프랑스 음식도 정통 퀴진, 한식도 정통 한식을 좋아한다. 청량음료가 아니라 생수, 약수 같은 것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새것만으로는 허망하다. 옛날 것(고전)에 의존해야 맛이 있고 깊이와 생명, 안정감이 있다. 내 작품 ‘침향무’도 조선을 넘어 신라에서 찾은 것이다.”

-1990년 민간인으론 처음 평양의 초청을 받아 방북했는데.
“당시 평양에서 열린 ‘범민족 통일음악회’에 참여했다. 판문점에서 걸어 휴전선을 넘었다. 개성에서 평양까지는 기차로 갔다. 돌아와서 북한 음악인들을 초청했고 그들이 방한해 공연했다. 공연 마지막 순서에서 북한 측이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부르고 주먹을 불끈 쥔 채 무대 앞으로 걸어 나오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논란이 생겼다. 2차 공연 때는 북한을 설득했다. ‘곡을 아리랑으로 하자’ ‘양보하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고 했다. 한편으로는 안기부·통일원(현 국정원·통일부) 관계자들에게 ‘북한이 서울에 또 오게 하기 위해 그들을 좀 거들겠다. 북한이 문을 여는 게 우리에게 유리한 것 아닌가’라고 설득했다.”

-박근혜 대통령에게 주문하고 싶은 것은.
“잘해 보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러나 혼자 힘으로는 되는 일이 없다. 결국 사람을 잘 써야 할 것이다. 정파를 떠나 좋은 인물을 발굴해야 한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당선인이었던 시절 그에게 말한 게 있다.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결코 하시지 않을 부탁 하나 하겠다. 재임기간 5년 중 딱 한 번만 국립극장에 구경 오시라. 아마 못하시겠죠’. 결국 이 전 대통령은 재임 중 한 번도 국립극장에 오지 않았다. 문화의 힘이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 (박 대통령은) 관심을 가져주시길 바란다.”

-가야금은 어떤 악기인가.
“오동나무와 명주실로 만드는 자연의 악기다. 골무를 쓰거나 아니면 손끝으로 직접 뜯는다. 현악기를 연주할 때 일본은 다다미, 중국은 탁자를 쓰지만 가야금은 무릎 위에 올려놓고 연주를 한다. 사람과 악기가 직접 피부로 접촉하니 줄과 육체가 연결되어 심금을 울리는 매력 있는 소리가 난다. 또 서양 현악기는 줄이 금속이고, 화음을 통해 소리를 벽돌처럼 쌓아가는 것이라면, 가야금은 여음이 있으며 음 하나하나가 속으로 파고들어간다. 그래서 소리를 쌓을 수가 없다.
또 중국 현은 팽팽하지만 가야금은 느슨하다. 줄을 탄다. 농현이라고 해서 가지고 논다. 여기서 깊은 맛이 난다. 특히 LP판으로 곡을 들으면 음질이 따뜻하다.

-돌 틈에서 자라다 말라 죽은 오동나무(石上自古桐)로 만든 가야금이 제일이라는데.
“맞다. 오동나무는 원래 영양분이 많은 곳에서 자란다. 나무질이 물러 손톱도 들어간다. 음성이다. 그런데 돌 틈에서 말라 죽었기에 양성이 많은 것이다. 대금도 100% 쌍골죽이다. 병든 대나무인 셈이다. 그런데 그 병든 쌍골죽 음색이 아름답다. 진주도 조개가 상처를 치유하면서 생긴 것이다. 인생도 편안한 곳보다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감동적인 사건이 탄생한다.”

-사람은 무엇으로 남는가.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는 옛말은 틀렸다. 집에 진짜 호피가 있었는데 세월이 지나니 털이 빠지고 애물단지가 되더라. 인사동에서 헐값에 팔았다. 이름을 남기려 애쓰는 이를 보면 안타깝다.
덩샤오핑을 생각해 본다. 그는 중국 13억 인구를 먹여 살리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은퇴한 뒤 후계자를 키웠고, 중국 지도부의 임기제를 정착시켰다. 사후에는 미라가 되어 국민의 참배를 강요한 레닌 등 다른 공산국가 지도자들과 달리 가루로만 남았다.”

-부인(소설가 한말숙씨)과 금혼식을 할 만큼 해로했는데 부부의 도(道)는 어때야 하나.
“고교 시절 가야금을 배울 때 대학 4학년생인 아내를 만났다. 오랜 세월을 함께했다. 부부는 내가 옳다고 주장하기 이전에 나 때문에 그 사람이 방해를 받지 않을까 생각해야 한다. 같이 살면서 혼자 사느니보다 못해서야 되겠나. 애국한다고 하기 전에 내가 나라에 손해를 끼치고 있지 않나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부부든 친구든 역시 의리가 중요하다.”

-앞으로의 계획은.
“『내가 만난 논어』란 책을 집필 중이다. ‘어린아이의 마음을 잃지 않는 게 큰 사람이다’라는 맹자의 말을 늘 마음속에 둔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인생은 자연에서 와서 자연으로 간다. 자연과 자연 사이에 있는 시간이 인생인데, 꼼짝 못하고 인간세상 속에 산다. 정직하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생각하는 잘 사는 방법은 비우는 것, 가급적 마음을 비우면서 노력하고 사는 것이다.”
 
 

“아이의 재능 DNA 찾아내 키워주려면 능력·사명감 있는 교사 우대 시스템 필요”

‘한예종의 기적’ 이끈 이강숙 전 한국예술종합대학 총장

이광재 객원 칼럼니스트·전 강원도 | 제339호 | 20130908 입력
 

이강숙 1936년생. 한국 최초의 음악학자로 서울대 음대 교수를 거쳐 한국예술종합학교 초대 총장으로 10년간 재임했다. 서울대 피아노학과를 졸업한 뒤 휴스턴대학에서 음악학 석사, 미시간주립대학 음악교육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1년 단편 ‘빈병 교향곡’으로 등단해 장편 ‘피아니스트의 탄생’ ‘젊은 음악가의 초상’ 등을 쓴 소설가이기도 하다. 현재 한예종 석좌교수와 안익태 기념재단 명예이사장, 러시아 모스크바국립음악원 명예교수를 맡고 있다. 2002년 금관문화훈장을 받았다.

황병기 이화여대 명예교수가 창의력 있는 인재들을 키우기 위해선 틀에 박힌 학교 시스템을 전면 개혁해 자유로운 교육환경을 만들어야 한다고 제언했다. 그런 교육 개혁의 성공사례로 꼽히는 한국예술종합학교(한예종)의 이강숙(77·사진) 전 총장을 만나 얘기를 들어봤다. 이 전 총장이 산파역을 맡은 한예종은 1992년 국가대표 예술교육기관으로 문을 연 뒤 창의력 위주의 학생 선발과 자유로운 교수 방식을 통해 피아니스트 손열음, 바이올리니스트 신현수, 뮤지컬 감독 장유정씨 등 예술계 인재를 배출해 왔다. 이 전 총장은 국가가 법으로 자유로운 예술교육을 보장·지원하고 유아·아동기에 예술을 집중 교육해 인재를 발굴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한국 최초의 음악학자이면서 최근엔 소설도 쓰고 있다. 왜 음악을 하고 글을 쓰는가.
“감동을 주기 때문에 좋아한다, 아니 사랑한다. 일상에서 조그만 일이라도 감동을 느끼는 그 순간이 정말 사는 것 같다. 슈베르트는 나를 울린다. 교직에서 은퇴한 지금 소설을 쓰고 있는데 어느 순간 머리를 스치는 단어나 문장을 기록하는 순간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든다.”

-우리나라가 ‘경제국가이자 문화국가’가 돼야 한다고 강조해 왔다.
“사람은 몸과 마음이 양대 기둥이다. 몸이 먹고사는 데는 경제가 기초다. 마음이 먹고사는 것은 교육과 문화, 예술이 제공한다. 몸과 마음은 따로 노는 것이 아니다. 그 때문에 경제국가와 문화국가가 함께 가야 한다. 또 몸이 삶의 목적이 아니라 마음이 삶의 목적이라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한예종의 기적’을 만들었다. 어려움이 많았을 텐데.
“‘예술학교 설치령’ 하나만 갖고 서울대 교수직을 버린 채 총장을 맡았다. 피아노 한 대 없이 시작했다. 예산이 없어 천재지변 발생 시 쓰이는 예비비를 억지로 받아내 문을 열었다. 살인적인 인내를 했다. 김동호 전 문화부 차관이 많이 도와줬다.”

-한예종 출신들이 세계 콩쿠르를 휩쓸고 예술교육의 새 역사를 만들고 있다. 성공요인은.
“교육 원리에다 예술 원리를 가미했기 때문이다. 현재 교단을 지배하는 ‘교육 원리’만 갖고 학교를 운영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다행히 교육부가 문화부에 한예종을 일임했고, 문화부는 내게 교수 채용권·운영권 등 전권을 줬다. 기존 교육 시스템으로 했다면 오늘날 세계적인 예술학교 한예종은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교수 채용 과정에서 한예종이 달랐던 점은.
“박사 학위 없어도 인재라면 채용했다. 첼리스트 정명화, 피아니스트 이경수를 교수로 임명했다. 처음엔 반발이 극심했지만 돌파했다. 기대에 어긋나지 않았다. 그분들은 훌륭한 교수로 맹활약했다. 서울대 교수직을 버리고 과감히 합류한 이건용·김남윤 교수의 열정도 학교를 빛나게 했다.”

-학생 선발은 어떻게 했나.
“진짜 학생들을 뽑겠다는 열정으로 했다. 입시 부정을 없애기 위해 심사위원을 전부 외국인으로 했다. 정원이 133명이었지만 절대평가제를 도입해 100명 아래로 뽑았다. 수능 성적 대신 예술적 재능만 보고 뽑았다. 의미 있는 인재들을 선발하기 위해서였다.”

-교수가 학생들을 가르친 방식은.
“레슨은 무제한으로 했다. 교수들이 한 차례 레슨을 한 시간부터 30시간까지 자유자재로 했다. 강충모·김대진 교수는 매일 레슨을 했다. 그 결과 손열음·김성욱·김현수 등 국제적인 피아니스트가 나왔다. 음악에 이어 연극·영상·무용·전통예술 등 분야별로 6년 만에 6개의 분과가 만들어졌다. 교수들과 서로 껴안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한예종의 장래는 어떻게 가나.
“연주 분야에서는 국제경쟁력이 확보됐지만 작곡에선 세계적 인재가 나오지 않고 있다. 이렇게 창의·창작 분야가 뒤떨어진 건 우리 사회 전 분야에 창의력이 부족한 게 한 원인일 거다.”

-창의력 있는 인재를 키우려면 아동기 교육이 중요하다는데.
“맞다. 음악은 생후 9개월 만에 소질이 결정된다는 말이 있다. 어릴 때부터 공부하는 커리큘럼이 달라야 한다. ‘아동 중심 교육’을 교과에 넣어야 한다. 선생이 아이의 DNA를 찾아내야 한다. 그런 능력과 사명감을 가진 선생이 우대받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암기 위주의 교육은 교육의 살인자가 되기 쉽다.”

-학생 중심의 교사 시스템을 강조하는 듯하다.
“수능 음악 시험을 보니 나도 못 푸는 문제가 나오더라. 선생이 주인이 아니라 학생이 주인이 돼야 한다. 쌍둥이를 낳아도 한 아이는 창가에서 하늘과 별과 비를 볼 수 있고, 한 아이는 벽만 보고 자란다. 아이들에겐 부모가 모르는 변수가 얼마든지 있다. 유럽처럼 유아·아동 교육에 최고의 교사가 배치돼야 한다.”

-교육 개혁에는 제도가 중요하다고 강조해 왔다.
“개혁은 말로 탄생하지 않는다. 더럽더라도 현실에 기반한다. 그래서 정치가 중요하고 리더가 중요하다. 한예종도 ‘한국예술종합학교 설치령’이라는 제도가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앞으로 ‘예술교육법’을 제정해 교육법이 예술교육의 모든 것을 간섭하는 현상을 없애야 한다.”

-박근혜 대통령에게 주문하고 싶은 게 있다면.
“한예종 제2캠퍼스를 만들어야 한다. 한예종은 현재 서울 석관동에 4개, 예술의 전당에 2개로 나뉘어 있는데 이를 하나로 묶어야 한다. 정부가 결단을 내려야 한다.”

-‘피벗 코드(Pivot Chord)’ 사회를 만들자고 주장해 왔는데.
“음악에서 서로 다른 두 조(調)에 공통으로 존재하는 화음을 피벗 코드라고 한다. G코드는 C장조에서는 속음이지만 G장조에선 주된 음이다. C장조와 G장조 중간지점에 공존하는 G코드 때문에 하나의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바꿔지는 전조현상이 일어난다. 우리 사회에도 갈라진 보수와 진보, 남과 북, 동과 서, 빈과 부를 연결하는 ‘피벗 코드’가 있어야 진화가 가능하다. 베토벤도 보수적인 사람이었지만 기존의 틀을 깨고 낭만주의의 선구자가 됐다. 민생도 중요하지만 몸과 마음을 더불어 먹여 살리는 지도자가 나와야 한다.”

-KBS 교향악단 총감독에서 한예종 총장, 소설가까지 다양한 삶을 살았다.
“열심히 했다. 무엇을 하든 다 좋았다. 근데 중독이 될 정도로 좀 더 열심히 할걸 하는 반성이 든다. 누군가는 미쳐서 일을 해야 세상이 바뀐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인생은 크레셴도(crescendo·점점 크게)와 디크레셴도(점점 작게)가 있다. 크레셴도와 디크레셴도가 자주 교차하는 게 좋은 인생 같다. 즉 인생엔 정착과 방황이 있는데 너무 쉽게 정착해도, 너무 많이 방황해도 안 된다는 거다. 방황할 만큼 방황하고, 정착할 만큼 정착하는 게 인생이다. 자신의 삶의 길을 발견해 태어난 보람을 느끼고 자신 때문에 사회도 득을 보는 일이 있다면 멋진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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