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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6주년 기획 이광재가 원로에게 묻다 <18> 종교계 원로 김장환 목사 - 이광재 객원교수 (20131117. 중앙sun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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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12-23 00:00:00

 

“종교 성숙해야 나라가 성공 … 종교 지도자도 자질 높여야”

창간 6주년 기획 이광재가 원로에게 묻다 <18> 종교계 원로 김장환 목사

대담·글=이광재 객원 칼럼니스트·전 강원도지사 | 제349호 | 20131117 입력
개신교계 원로 김장환(79·사진) 목사는 남다른 기록이 많다. 40년 전인 1973년 5월 서울 여의도에서 닷새 동안 320만 명이 모여 세계 최대의 집회로 기록된 빌리 그레이엄 목사 전도대회에서 통역을 맡았다. 또 박정희·전두환·김영삼·김대중·노무현·이명박 전 대통령과 두루 친해 이들을 수시로 독대했다. 동양인으로는 처음 침례교세계연맹(BWA) 총회장을 맡아 전 세계 1억5000만 명 침례교인을 이끌었다. 165㎝ 단구의 그가 뿜어내는 열정의 리더십이 세인들을 감동시킨 결과다. 그는 세계 어디를 가든 늘 새벽 4시에 일어나 기도로 일과를 시작한다. 보수 기독교 교단의 원로지만 여당이 먼저 야당에 손을 내밀어야 한다고 주문하고, 북한을 열린 마음으로 도와야 한다고 주장한다. 두 아들에게 자신이 몸담아온 수원중앙침례교회를 물려주는 대신 개척교회 목사로 독립시킨 김 목사를 지난 주말 만나 한국 종교가 나아갈 길을 물었다.
 

김장환 1934년 경기도 수원 출생. 미국 밥 존스 고등학교, 밥 존스 신학대 졸업 후 같은 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땄다. 미국 단테 제일침례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뒤 수원중앙침례교회 목사를 지냈으며 1973년 여의도에서 열린 한국 빌리 그레이엄 전도대회를 통역해 이름을 날렸다. 극동방송 사장과 아시아침례교연맹 회장을 역임했고 2000년부터 5년간 침례교세계연맹 총회장을 지냈다. 현재 국제YFC 부이사장과 명지학원 명예이사장을 맡고 있으며 국제구호단체인 컴패션 이사장과 기아대책의 이사로 있다. 극동방송 이사장, 아세아 방송국 이사장, 국민일보 이사를 겸임하고 있다. 미국 개신교계와 정계에 폭넓은 네트워크를 갖고 있어 한미 관계가 껄끄러울 때 양국 간 채널 역할을 해 왔다.

-고령임에도 건강해 보이는 비결은.
“특별한 것은 없다. 대추와 홍삼을 푹 달여 냉장고에 넣어 두고 매일 아침 공복 상태에서 한 컵씩 먹는 정도다.”

-6·25전쟁 당시 미군 부대에서 하우스 보이(심부름 소년)로 지내다 미국 유학을 갔는데.
“당시 칼 파워즈란 미군 상사가 유학의 길을 열어 주었다. 내 어머니는 유학길에 오른 내게 부적 2장을 주셨다. 그러면서 ‘고향 생각에 병이 나면 물에 달여 먹으라’며 주머니에 흙을 담아 주셨다. 17세 때 부산항에서 미국행 배에 올랐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농림부 장관이 돼 대한민국을 가난에서 벗어나게 하고 싶은 꿈을 가졌다. 그러나 미국에서 예수를 만나고 신앙이 깊어지면서 성직자의 길을 택했다. 신학을 공부하기로 방향을 바꾼 것이다.”

 

김장환 목사(완쪽)가 이광재 전 지사에게 자신의 저서를 보여주며 담소하고 있다. 조용철 기자

-1960년대 초 귀국해 목회활동을 개시했다. 당시 힘들었던 일은.
“조용기 목사가 ‘서울에서 개척교회를 하자’고 했는데, 나는 고향을 지킨다는 마음에 수원에서 목회를 시작했다. 25세 때였다. 당시 우리나라 국민소득이 68달러였다. 교회를 짓는 것 자체가 어려웠다. 12명의 교인으로 시작했다. 교인들이 시계나 패물을 판 돈으로 벽돌을 구해 교회를 지었다. 그때만 생각하면 가슴이 뭉클하다.”

-평소 소외된 이웃을 도와야 한다고 강조해 왔다. 이웃을 도운 일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내전으로 고통받는 시리아 난민들을 도운 일이다. 난민의 70%가 부녀자와 아이들이었다. 유엔에서 천막을 줬지만 비바람이 불면 날아가니 컨테이너 하우스가 필요하다고 했다. 컨테이너 한 개에 18가구가 살기도 했다. 극동방송에서 컨테이너 100개 확보를 목표로 돕기 운동을 시작했는데, 400개를 구할 수 있는 돈이 모였다. 거기에다 SK 최태원 회장이 1000개를 쾌척했고 정부도 300개를 보태줘 모두 1700개를 시리아에 보냈다. 태극기가 부착된 컨테이너를 전달하면서 6·25 때 어려웠던 우리 모습이 떠올랐다. 모금된 돈이 남아 학교에 못 가는 시리아 아이들을 위한 축구장을 5개 세우고 코치도 구해 줬다. 그 아이들이 월드컵에 출전하는 날을 기대해 본다.”

-목회자로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사명을 받았기에 정열적으로, 부지런히 일했다. 무엇보다도 한국인은 정이 많다. 성도들의 뒷받침이 가장 큰 힘이 되었다.”

-40년 전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방한이 목사로서 성장하는 데 큰 기회가 됐다.
“인생이라는 게 그렇듯 열심히 하다 보니 기회라는 게 왔다. 73년 그레이엄 목사 부흥회가 여의도에서 열렸는데 100만 명이 운집했다.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가 그레이엄 목사를 초청했는데, 내가 통역을 맡게 됐다. 이 부흥회는 미국 전역에 수차례 방영됐다. 이런 경력 덕분에 2000년대 초 침례교세계연맹 총회장을 맡으면서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고 활동 공간도 커졌다.”

-침례교세계연맹 총회장을 지낼 때 기억에 남는 일은.
“동유럽 각국의 정상들과 쿠바의 카스트로를 만난 것이다. 카스트로와는 2시간20분 동안 만났다. 교황의 초청도 받았다. 77년 66만 달러의 부채를 안은 극동방송을 인수해 부흥에 힘쓴 결과 30여 년 만에 유수의 종교방송으로 자리 잡게 한 것도 기억에 남는 일이다. 방송사 사옥을 재건축하는 데 6만4000명의 성도와 교회 수십 곳이 힘을 보태줬다.”

-한국 종교의 장점은 무엇인가.
“약간의 갈등은 있지만 종교 간 분쟁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이집트나 터키는 이슬람과 기독교의 갈등으로 국가적 위기를 겪어왔다. 그러나 우리 나라는 불교가 크리스마스 행사에 참여하고, 교회가 사월 초파일 행사에 참가하고 있다. 또 모든 종교가 북한 어린이와 소외 계층을 돕고, 양로원과 어린이집을 운영하고 있다. 이는 높이 평가돼야 한다. 종교가 성숙한 나라가 성공한다. 종교가 부패하고 분열하면 나라가 어지러워진다. 종교는 사회적 자산이다.”

-기독교인으로서 집안 제사 문제는 어떻게 해결했나.
“아버지 제사 때 ‘추모 예배를 드리자’고 형님들에게 제안했다. 마음에 안 들면 다시 제사를 지내자고 했다. 형들이 받아줘서 제삿날 저녁 7시에 예배를 드리고, 조카가 추도사를 읽었다. 숙연한 분위기였다. 끝난 뒤 ‘추도 예배가 어떠셨느냐’고 물으니 다들 좋았다고 했다. 어머니가 별세했을 때는 집 대신 수원 기독교회관에서 장례식을 치렀다. 당시로선 파격이었다. 형제들은 회관에서 장례식을 치르되 상복을 입게 해 주면 된다고 했다. 그래서 나까지 가족 전원이 상복을 입고 장례를 치렀다. 그러면서 장례식장에 늘 돌기 마련인 술을 내놓지 않았다. 자연 조문객들끼리 싸움하는 불상사가 없었다. 이렇게 가족들 간에 서로 하나씩 양보하면서 변화를 이뤄냈다. 이런 지혜가 필요하다.”

-우리 종교가 극복해야 할 점은 무엇인가.
“종교 지도자들의 자질을 높여야 한다. 좋은 정치 지도자가 나와야 국민이 행복해지듯 좋은 종교 지도자가 나와야 신도들이 인격적으로 성숙해진다. 개신교단이 서로 뭉치지 못하고 갈등을 반복하는 데 대해 마음 아프게 생각한다.”

-좋은 종교 지도자가 나오려면 그런 지도자를 교육하는 시스템이 중요한데.
“무인가 교육시설들이 문제다. 정부가 지나치게 간섭하는 건 문제지만, 적절한 통제 기능은 필요하다. 정부는 교육시설들에 경제적 지원을 하고 교수진 대우에도 신경을 써 훌륭한 종교 지도자가 나올 토양을 만들어야 한다.”

-교회 대형화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은데.
“큰 교회나 사찰들은 사실 큰 일을 많이 한다. 다만 농어촌의 작은 교회를 잘 돌보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고 있는 건 잘 안다.
(대형 교회에서 개척교회를 지원해 줘야 하는 것 아닌가?) 그래야 한다. 우리도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교회들이 개별적으로 지원하는 대신 연합해 도와주면 훨씬 효율적일 텐데 그러지 못해 아쉽다. 다만 이런 일이 이뤄지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과거 자동차가 드물 땐 자신의 차를 남에게 빌려주지 않으려 했지만 요즘은 달라진 것처럼 말이다.”

-대형 교회 목사들이 교회를 자식에게 물려주는 것도 논란인데.
“기본적으로 개별 교회가 결정할 문제다. 외부에서 이렇다 저렇다 참견하긴 어렵다. 나는 아들이 둘 있는데 둘 다 목사다. 나보다 (신학) 공부를 많이 했다. 나는 수원의 한 교회에서 목회를 45년 했다. 당연히 성도들은 내 아들이 교회를 승계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나도, 아들들도 승계를 원치 않았다. 한 아이는 수원에서, 다른 아이는 대전에서 각각 교회를 세워 자립했다.”

-교회 승계 문제의 지혜로운 해법은 무엇일까.
“개별 교회가 결정할 문제다. 다만 아버지 목사의 지혜가 있었기에 교회가 성장했을 것이다. 교회가 자식 승계를 원한다 해도 아버지가 은퇴한 뒤 일정 기간이 지난 후 승계가 이뤄지는 게 맞지 않을까 싶다.”

-목회활동을 하면서 월급을 한 곳에서만 받는 원칙을 세웠다는데.
“그렇다. 66년 수원중앙침례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했지만, 사례비는 14년 뒤인 80년부터 받기 시작했다. 극동방송 사장으로도 일했지만 방송사에서 월급을 받은 적이 없다. 부흥회 등에서 받은 사례비도 모두 극동방송에 보냈다. 그 철칙은 두 아들들에게도 이어지고 있다. 두 아들도 집회에서 받은 사례비를 선교헌금으로 쓴다. 내 아내도 79년부터 지금까지 중앙기독유치원장으로 일해 왔지만 월급을 받지 않았다. 누군가를 돕고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는 정치에 대한 올바른 처신으로 존경을 받는데.
“그레이엄 목사는 올해 95세다. 정치에 참여해 달라는 유혹을 수도 없이 받았지만 목사의 본분을 지켰다. 리처드 닉슨의 하야 이후 공화당이 ‘대통령 후보로 나서 달라’고 여러 번 요청했지만 그는 뿌리쳤다. 나는 그의 집에서 자기도 했고, 73년 한국에 왔을 땐 3주간 같이 지내기도 했다. 트루먼부터 오바마까지 역대 미국 대통령들이 그의 기도를 받기를 원했다. 오바마는 대통령 당선 뒤 그의 집에까지 가서 기도를 받았다. 그런데도 그레이엄 목사는 겸손하며, 주변의 모든 사람을 격의 없이 대한다.”

-본인도 정치 참여 권유를 받은 적이 있지 않나.
“전두환정부 시절 이종찬 민정당 원내총무가 수원에서 출마해 달라고 권유했다. 당장 거절하긴 뭣해서 사흘 동안 기도할 시간을 달라고 한 뒤 편지를 보냈다. ‘나도 젊은 시절 미국에 유학할 때는 정치할 뜻이 있었으나 그 뒤 성직자의 길을 가겠다고 마음을 바꿨다. 성직자로서 나라가 잘 되도록 돕겠다’며 거절하는 내용이었다.”

-역대 대통령 모두와 가까운데.
“그렇다 보니 ‘정치 목사’라는 소리도 듣는다. 성직자의 길을 걸으면서 역대 대통령을 모두 기도와 전도의 대상으로 생각했고, 이를 실천해 왔다. 2006년 반기문 외교부 장관(당시)이 유엔 사무총장 선거에 나섰을 때 노무현 대통령이 외국을 순방하며 득표활동을 했다. 그때 노 대통령을 만나 기도를 해 줬다. 대통령을 전도하면 장관도 전도하기 쉽지 않나? 성경에도 ‘권력 잡은 자를 위해 기도하라’는 구절이 있다.”

-우리나라는 정치적 분열이 워낙 심해 국민을 갈라놓고 있는데.
“성경에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원수를 사랑하고, 원수를 위해 기도하라’는 말이 있다. 서로 노력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지역과 학연, 남북과 동서 간에 갈등이 심하다. 한 세대는 더 지나가야 해결될 것 같다. 우리 국민 한 명이 일본인 한 명과 붙으면 쉽게 이긴다. 그러나 국민끼리 붙으면 일본에 진다. 분열 때문이다. 내가 제사 문제에 부닥치자 형제들과 하나씩 주고받으며 해결해 나갔듯이 정치도 여당과 야당이 서로 주고받으며 공존해야 한다.”

-남북문제는 어떻게 풀어야 하나.
“정부가 대북접촉에 대해 통제가 심한데, 민간 종교단체들에 역할을 줘야 한다. 한국은 수출이 세계 7위이고, 12번째 경제대국이다. 북한을 자신 있게 대해야 한다. 북한이 핵을 포기하도록 지난 20년 동안 정부가 노력했지만 변화된 게 없다. 결국 민간을 통해 북한 개방의 물꼬를 터야 한다. 그러면 남북관계도 풀릴 것이다.”

-북한의 식량난은 어떻게 해야 하나.
“우리도 과거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며 힘든 시기를 극복했다. 식량문제는 인도적 입장에서 자신감 있게 지원해야 한다. 국내 비료업체에 비료를 생산하고 남은 재료가 3200t이나 있다고 한다. 이걸 보관하는 비용만 1년에 100억원이 든다고 한다. 재료에 비료 성분이 남아 있어 북한의 농토에 뿌리면 수확이 크게 늘어날 수 있다. 우리 정부가 허가하면 운반비용은 종교단체에서 댈 수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남북화해의 물꼬를 트기를 바란다고도 했다.
“박 대통령은 2002년 김정일을 만난 적이 있다. 그런 박 대통령이 북한문제를 해결하면 큰 점수를 받을 것이다. 참모 가운데 누구의 말을 듣는지가 중요할 거다. 지난주 한·러 정상회담에서 나진·선봉 경제특구에서 우리와 북한·러시아가 협력하는 방안이 논의됐다. 박 대통령이 이런 논의를 바탕으로 북한과 딜을 성사시키면 대단한 대통령으로 남을 것이다.”

-박 대통령에게 주문하고 싶은 건.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탄생했다. 소외된 이웃과 여성들이 힘있게 일할 수 있는 문을 열어주길 바란다. 박 대통령을 위해 새벽마다 기도를 하고 있다.”

-바람직한 신앙생활의 길은 무엇인가.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란 가르침이 중요하다. 얼마 전 병원에 갔다. 아주머니 한 분이 아이를 안고 복도에서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사연을 물어보니 ‘불광동 버스터미널 휴지통에 버려진 아이를 구해 왔다’고 했다. 이 아주머니처럼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한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오늘 있다가 내일 없어지는, 안개와도 같은 것이다. 천년만년 살 것 같지만 인생은 잠깐이다. 어린아이가 무지개를 좇는 것과 같은 거다. 그런 만큼 하루하루를 멋지게 살아야 한다. 다들 내일과 미래를 얘기하는데, 내일은 약속을 받지 못한 것이고, 어제는 이미 지나간 것이다. 오늘 하루를 열심히 사는 게 중요하다.”
http://sunday.joins.com/article/view.asp?aid=32133
 

“종교 간 경쟁·균형 있어야 사회도 역동성 역사상 권력 비호 받던 종교는 모두 몰락”

종교사회학자 김종서 교수가 말하는 ‘건강한 종교’

이광재 객원 칼럼니스트·전 강원도지사 | 제349호 | 20131117 입력
 

김종서 1952년 서울 출생. 경복고와 서울대 종교학과를 졸업한 뒤 UC 샌타바버라대학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와 서울대 중앙도서관 관장, 한국종교학회 회장을 지냈으며 현재 서울대 출판문화원 원장과 한국종교학회 이사를 맡고 있다.

“종교는 사회적 자산이다. 종교가 건강해야 나라가 건강해진다.”

김장환 목사가 이렇게 강조했다. 이에 김종서(61·사진)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를 만나 ‘건강한 종교’가 실현되기 위한 방법론을 들어봤다. 종교사회학의 권위자인 김 교수는 종교 간의 벽을 허물기 위한 국제포럼 ‘세계 종교 간의 대화’에 여러 차례 한국을 대표해 발표자로 나섰다. 이를 통해 종교와 국가·사회 간의 건전한 관계를 위한 방안들을 제시해 왔다.

-인간에게 종교란 무엇인가.
“순기능이 있다. 능력과 재산이 많다한들 산다는 건 힘든 거다. 불안하고, 걱정이 많다. 그러나 교회나 사찰을 열심히 다니며 신앙생활을 하면 정신적인 힘이 생긴다. 또 종교는 기본적으로 공동체를 중시한다. 인간은 혼자 있으면 힘들고 외롭다.”

-쉬운 말로 하느님, 부처님을 ‘빽’으로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말로 이해해도 되나.
“(웃음) 그렇다. 어렵고 힘들 때 버팀목이 되는 측면이 있다.”

-한국 종교의 현실은 어떤가.
“세계에서 유일하게 동서양 종교가 비슷한 규모로 공존하고 있다. 불교가 1032만 명, 기독교가 816만 명, 가톨릭이 595만 명 선이다. 우리 국민의 53.7%가 종교를 갖고 있다. 일본은 20~30%, 중국은 8~15% 선이다. 종교끼리 경쟁하며 균형을 이루면 사회에 역동성이 생긴다. 종교를 사회적 자본으로 인식해야 하는 이유다.”

-종교가 우리 사회에 미친 순기능은 무엇인가.
“한국 사회는 빠르게 발전해 왔다. 다들 열심히 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늘 힘겹고 불안한 가운데 살아 왔다. 그럴 때 마음에 기댈 수 있는 게 종교였다. 1938년과 2005년을 비교하면 인구는 1370만 명에서 4700만 명으로 3.4배 늘었지만 종교를 가진 이는 71만 명에서 2497만 명으로 35배나 급증했다.”

-스웨덴에선 금주운동부터 노동당 창당까지 종교가 큰 기여를 했는데.
“스웨덴 노동자들은 산업혁명 당시 삶이 힘들어 술을 많이 마셨다. 이게 그들의 삶을 황폐하게 했다. 이때 기독교가 금주운동을 개시했고, 나아가 노동조합 결성과 노동당 창당도 주도했다. 우리도 일제시대 기독교인인 조만식 선생이 민족자본 형성운동을 했다. 최근엔 가톨릭의 ‘내 탓이오’ 운동이 우리 사회 개선에 많은 기여를 했다.”

-교회 대형화 논란이 거세다. 무엇이 문제인가.
“교회가 대형화되면 장점도 있다. 미국의 경우 대형 교회는 목사의 설교를 준비하는 팀이 예일대 같은 명문대 출신들이다. 설교의 질이 높다. 반면에 대형화의 결과 하느님에게 기도하는 게 아니라 예배를 중계하는 TV 화면에 대고 기도하게 됐다는 비판도 나온다. 무엇보다 목회자가 신도 개개인의 삶에 직접 들어가지 못하게 되는 현실이 가장 큰 문제다.”

-교회나 그 밖의 종교시설을 자식에게 승계하는 건 어떻게 봐야 하나.
“미국의 감리교나 장로교를 보면 그런 승계는 불가능하다. 목사가 70세를 넘겨 정년에 이르면 자신이 맡았던 교회에 나가지 않는 게 전통처럼 돼 있다. 후임자를 위한 배려다. 우리나라의 경우 교회를 자식에게 물려줄 수도 있다. 그러나 목사는 기댈 곳 없는 광야에서 부름 받은 이들이 목회를 하는 자리다. 그래야 신도를 설득할 수 있는 카리스마가 나온다. 재산을 물려줄 순 있어도 카리스마를 물려주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대형교회에서 개척교회를 지원하고, 목회자들이 은퇴하면 지원해주는 제도도 필요한 게 아닌가.
“그렇다. 미국은 은퇴 목회자에 대한 지원체제가 잘돼 있지만 우리는 그렇지 못하다. 대형교회 목회자와 개척교회 목회자의 은퇴 후 삶의 격차가 큰 게 현실이다.”

-훌륭한 종교지도자를 배출하는 교육시스템이 필요한데.
“미국에서는 목회자가 되려면 일반대학을 나온 뒤 신학대학원에서 석사를 마쳐야 한다. 우리의 경우 교육부 인가를 받은 종교 교육시설들은 학생들을 엄격히 교육하려 노력한다. 과거보다 훨씬 나아졌다. 문제는 무인가 학교들이다. 이들 학교에 정제된 교육시스템을 도입하는 게 시급하다.”

-정권의 비호를 받은 종교는 반드시 망한다고 주장했다.
“당나라 시절 왕조의 비호를 받은 불교 화엄종이 그랬다. 반면 권력과 거리를 두고 자급자족했던 선종은 살아 남았다. 고려 말 불교도 권력과 너무 밀착한 결과 무너지고 말았다. 유럽도 교황권이 지나치게 커지면서 위기를 맞았다. 종교가 권력에 기대 세력을 확장하면 신도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는 원래의 기능은 사라지고 권력투쟁에 휘말려 희생되고 만다.”

-지금 유럽에선 정치와 종교의 관계가 어떤가.
“독일엔 국교가 있다. 종교세도 낸다. 기민당(기독교민주당)처럼 종교를 이름에 넣은 정당도 있다. 그러나 독일인들은 기독교가 정치화하는 데 강력히 반대한다. 건전한 정당정치를 추구할 뿐이다.”

-종교의 탈정치화 측면에서 미국의 빌리 그레이엄 목사가 존경을 받는데.
“그가 하는 설교엔 대단한 힘이 있었다. 방송으로 중계된 그의 부흥회는 큰 반향을 일으켰다. 미국 대통령들에게도 영향력을 미쳤다. 그러나 그는 절제했다. 종교적 순수성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역사적으로 보면 본연에 충실한 종교가 오래간다.”

-석가모니와 예수·공자의 말씀이 수천 년간 힘을 잃지 않는 이유는 뭔가.
“세 분 다 쉬운 말로 교리를 전파했다. 또 말에 그치지 않고 실천을 한 점, 시류나 유행을 따르는 대신 인간 삶의 근본에 천착한 사상을 내놓은 것도 공통점이다.”

-기독교와 불교·이슬람교를 각각 평가한다면.
“기독교는 윤리성이 강하다. 하늘로부터 부름을 받고, 인간이 지켜야 할 도리를 밝혔다. 불교는 석가가 왕자의 지위를 버리고 수행의 모범을 보인 점이 핵심이다. 이슬람은 사막처럼 척박한 곳에서 나온 종교이다 보니 공동체정신이 강한 게 특징이다. 이슬람 국가에서 공산주의가 힘을 쓰지 못하는 것도 특징의 하나다.”

-우리나라 종교들의 향후 교세를 전망한다면.
“불교는 현재 신도 수가 가장 많지만 젊은 신도가 적은 게 문제다. 개신교는 1995년 이후 성장률이 마이너스(-1.7%)다. 반면 가톨릭은 95~2005년의 10년 동안 74%의 성장률을 보였다. 조심스러운 전망이지만 2015년이 되면 가톨릭이 개신교를 앞지를 가능성도 있다.”

-가톨릭 신도가 늘어나는 이유는 무엇인가.
“고(故) 김수환 추기경 등 가톨릭 사제들이 민주화 운동에 기여한 사실이 부각되면서 ‘정의의 종교’란 인식이 생겼다. 조선 후기 가톨릭이 전래될 때 박해를 피하기 위해 우리 전통에 적응한 점도 작용한 듯하다. 제사에 대한 융통성 있는 태도 같은 게 그 예다. 그래선지 연로하신 분들의 가톨릭 귀의가 늘고 있다.”

-바람직한 종교 생활은.
“아버지는 불교를 믿었지만 내게는 ‘교회에 나가 좋은 말씀을 들어보라’고 권하셨다. 하나의 종교에 빠지는 대신 다른 종교를 접해보고 자신에게 맞는 건전한 신앙생활을 하는 게 중요하다.”

-정부의 종교 정책은 어때야 하나.
“국가가 종교에 깊이 관여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건강한 종교를 지원하되 특정 종교에 편향되지 말아야 한다. 또 국민들이 어려서부터 여러 종교를 비교하며 이해하게끔 교육해야 종교 간 갈등이 적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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