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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6주년 기획 이광재가 원로에게 묻다 <19> 이명재 전 검찰총장 - 이광재 객원교수 (20131201. 중앙sun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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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12-23 00:00:00

 

“수난은 검찰총장 숙명 … 대통령에게 ‘아니오’라고 할 용기·고집 있어야”

창간 6주년 기획 이광재가 원로에게 묻다 <19> 이명재 전 검찰총장

대담·글=이광재 객원 칼럼니스트·전 강원도지사 | 제351호 | 20131201 입력
국정원 댓글 수사를 둘러싼 내홍으로 검찰이 휘청대고 있다. 이런 시점에서 ‘수도승 총장’으로 불려온 이명재(70·사진) 전 검찰총장을 만났다. 지난 주말 그가 고문변호사로 일하는 한 로펌의 사무실에서다. 그가 언론에 입을 연 건 2002년 11월 검찰총장직을 물러난 이래 처음이다. 대검중수과장과 서울지검 특수부장, 대검중수부장을 거쳐 제31대 검찰총장을 역임한 그는 역대 정권의 핵심 사건들을 도맡아 처리했다. 전두환정부 시절 이철희·장영자 어음사건, 노태우정부 시절 5공 비리수사, 김대중정부 시절 대통령의 아들인 김홍업씨 비리의혹사건이 모두 그의 손을 거쳤다. 권력과 직결된 민감한 사건들이었지만 청와대의 압력에 밀리지 않고 중립적인 수사 결과를 내놔 호평을 받았다. 요즘 검찰이 보이는 난맥상에 대해 할 말이 많을 수밖에 없다. 그는 “검찰이 언론이나 국민정서를 탓하기 앞서 정말 국민만 보면서 투명하고 공정하게 수사했는지 돌아봐야 한다”고 힘줘 말했다. “정치적 사건에 관한 한 검찰은 관련된 정치세력들에 대해 ‘색맹’이 돼야 한다”고도 했다.
 

이명재 1943년 경북 영주 출생. 경북고와 서울대 법대를 졸업했다. 69년 사법시험(11회)에 합격, 사법연수원을 1기로 수료했다. 이어 서울지방검찰청 영등포지청 검사로 부임하며 검찰에 입문했다. 대검찰청 중수부장과 부산고검·서울고검장을 지낸 뒤 2001년 퇴직해 변호사를 개업했다. 이듬해 2002년 1월 김대중정부에 의해 검찰총장에 발탁돼 그해 11월까지 제31대 검찰총장을 지냈다. 경제 관련 범죄 수사에 두각을 나타내 이철희·장영자 부부 어음사기·영동개발비리사건과 5공 비리, 환란·세풍(稅風)사건 등을 처리했다. 검찰총장 퇴임 뒤 지금까지 법무법인 태평양의 고문변호사를 지내고 있다.

 
-총장직에서 물러나 야인으로 돌아간 지 11년1개월 만에 처음 인터뷰에 응했다.
“나는 원래 말 재주가 없고, 언론에 나는 것도 별로인 사람이다. 그런데 이번에 딱 걸렸네.(웃음)”

-서울고검장 시절 신승남 검찰총장이 내정되자 사표를 냈다.
“인생도 관직도 언젠가는 다 그만두는 것 아닌가? 후배들에게 길을 열어주고 퇴장하는 게 옳다고 봤다. 나와서 변호사를 하고 있는데 뜻밖에 검찰총장에 임명됐다. 이유는 모르겠다. 다만 ‘검찰의 환골탈태를 위해 외부인사를 기용하자’란 논의가 있었다는 언론 보도를 봤다. 임명 당시 여야 모두 환영 논평을 낸 것으로 기억한다.”

 

이명재 전 검찰총장(오른쪽)과 이광재 전 강원도지사. 조용철 기자

-하지만 총장이 된 뒤 임기가 1년 이상 남은 시점에서 그만뒀다.
“아침 산책을 하다가 서울중앙지검 강력부로부터 ‘조사받던 피의자가 숨졌다’는 보고를 받았다.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일주일간 감찰을 한 결과 사망 원인이 구타인 것으로 드러났다. 일요일 하루를 내내 고민한 뒤 법무부 장관에게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하는데 내가 책임지겠다’며 사표를 내고 다음날 퇴임식을 했다.”

-총장 재임 당시 집무실에 아무것도 들여놓지 않았다는데.
“‘이명재 총장의 책장엔 책 한 권 꽂혀 있지 않고 책상 위에는 법전 한 권과 출퇴근 때 들고다니는 007 가방만 놓여 있다. 총장실의 전통적인 소품인 대통령과의 악수 사진도 없다’란 신문 보도가 나왔다. 이 때문에 ‘수도승 총장’이란 별명을 얻었다.”

-당시 언론들은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언제라도 그만둘 수 있다’는 의미라고 해석했다.
“평검사 시절부터 집무실 치장을 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자리에 연연하지 말자고 결심한 것은 맞으나 그것을 보여주려고 그런 건 아니다. 공직이란 걸 천직으로 여기고 일하면서도 언제든 떠날 준비를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싶다.”

-변호사를 하면서 보는 검찰은 어떤 모습인가.
“검찰의 내분이나 과잉수사에 대한 비판에 공감하는 바도 있지만 어려운 수사 여건에서 고생하는 검찰에 대한 애정엔 변함이 없다. 다만 검사들이 피조사인들의 얘기를 많이 듣고 역지사지(易地思之)하는 자세를 가졌으면 좋겠다. 잘 들어주면 수사도 더 잘될 것이다.”

-그래서 변호사 경험을 한 사람을 판사나 검사에 임용해야 한다는 얘기가 나오는데.
“이제는 폭넓은 경험을 가진 인사가 판검사가 되는 게 맞다고 본다. 오염을 이유로 반대하는 것은 시대에 뒤떨어진 얘기다.”

-국정원 댓글 의혹 사건 수사를 둘러싸고 수사 검사의 항명과 징계로 검찰이 혼란스럽다.
“검찰에 몸담았던 사람으로서 무척 갑갑하다. 검사들이 수사하다 상사와 갈등을 빚는 일은 옛날부터 있어왔다. 그러나 대부분 토론을 통해 상사들이 수사팀 의견을 수용하고, 한목소리를 내며 사태를 수습했다. 이번엔 왜 그렇게 하지 못했는지 의문이다.”

-이번 사건의 수습은 어떻게 해야 하나.
“수사 검사가 바뀌었지만 결국은 변경된 공소장에 따라 공소를 유지하고 있지 않나. 일어나지 않아도 될 일이 일어나 국민의 불신만 키운 것이다.”

-이번 사건으로 검찰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땅에 떨어졌는데.
“검찰의 최우선 과제는 정치적 사건에서 중립성을 유지하는 것이다. 검사 개개인이 자신과 타협하지 않고 안팎의 유혹을 뿌리쳐야 한다. 미국에는 ‘정의는 반드시 행해져야 할 뿐 아니라 보여져야 한다’는 법언이 있다. 수사의 공정성 못지않게 중요한 게 ‘공정하게 보이는 것’이다.”

-검찰은 언론의 앞서가는 보도나 ‘국민정서법’이 문제라고 주장하는데.
“억울한 경우도 있겠지만 검찰로선 자신들의 수사방식과 절차에 문제가 없는지 먼저 돌아봐야 한다. 우선 의혹사건은 수사 개시 결정부터 합리적·객관적 기준에 따라 이뤄져야 한다. 그래야 표적수사나 의혹해명성 수사란 오해를 사지 않고 성과도 거둘 수 있을 것이다. 또 수사는 실무자 전원의 중론을 모아 합리적 결론이 도출되도록 투명하게 운용해야 한다. 결론이 나오면 수사팀은 한목소리를 내야 한다.”

-“이명재 검찰총장 시절과 안대희 중수부장 시절 검찰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가장 높았다”는 얘기가 있다.
“당시 대통령 아들의 비리의혹을 수사하고 여야를 막론하고 대선자금을 파헤친 덕분인 것 같다. 검찰이 신뢰를 얻으려면 권력과 거리를 두는 게 핵심이다. 정치사건에 관한 한 정파의 색깔을 구분하지 못하는 색맹이 되겠다는 각오가 있어야 한다.”

-검사 시절 외압을 받은 경험은 없나.
“내 지휘부에 무슨 외압이 들어왔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나는 소신껏 수사를 했다. 내가 지휘부에 있을 때도 부하들에게 소신껏 하라고 했다.”

-올바른 검사의 길은 무엇인가.
“검찰총장 취임사에서 ‘진정한 무사는 겨울날 얼어 죽을지언정 곁불을 쬐지 않는다. 하늘을 나는 기러기는 무리지어 날아감으로써 오래 날 수 있고 위엄도 생겨 어떤 난폭한 조류도 덤비지 못한다’고 했다. 검사는 명예를 먹고 산다. ‘곁불 쬐지 말라’는 건 검사들이 명예를 소중히 여길 것을 촉구한 말이고 기러기 언급은 단결과 팀워크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거대한 불의에 맞서기 위해선 검찰이 한목소리를 내야 한다.”

-결국 검찰이 권력으로부터 독립해야 한다는 얘기인데.
“손태규 단국대 교수의 일간지 기고문을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온다. ‘검찰총장은 대통령의 총장이면서 국민의 총장이어야 한다. 정치적 압력을 피할 수 없으면서도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한다.’ 이런 모순이 어디 있는가? 영국의 검찰총장이었던 마이클 헤이버스는 검찰총장에 대해 ‘때로는 감당할 수 없는 자리에 놓인 사람’이라고 일컬었다. 수난은 검찰총장의 숙명인 것이다. 카터 대통령 시절 법무부 장관을 지낸 그리핀 벨은 카터와 친분이 두터웠지만 ‘대통령이라도 옳은 일이 아니면 돕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임기 내내 이 약속을 지켰다. 은퇴할 때 ‘벨보다 더 잘한 검찰총장은 없었다’는 칭찬을 받았다.”

-검찰총장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얘기로 들린다.
“그렇다. 총장이 잘해야 한다. 정치적 중립에 대한 확고한 의지와 판단력이 있어야 한다. 대통령에게 ‘아니오’라 말할 수 있는 용기와 고집이 있어야 한다. 국민의 검찰총장이 되겠다는 각오를 하고 실행에 옮겨야 한다.”

-우리나라에서 대통령과 검찰총장이 충돌한 사례가 있나.
“김의진 제2대 검찰총장의 경우다. 그는 검찰을 정권의 시녀로 만들려는 이승만 대통령(당시)에 맞서다 옥고까지 치렀다. 1950년 4월 경무대에 줄을 댄 정치브로커 김태수가 이 대통령의 허락 아래 무고한 인사들을 공산당으로 조작한 ‘대한 정치 공작대’ 사건이 발생한다. 이 대통령은 김 총장에게 ‘이 사건에 일절 관여하지 말라’는 특명을 내렸지만 김 총장은 공작대원 108명을 검거했다.”

-이 대통령이 가만히 있지 않았을 텐데.
“이 사건으로 두 달 뒤 김 총장은 서울고검장으로 좌천됐다. 김 총장은 사표를 던질 수도 있었지만 ‘대통령이 그만두라고 해서 그만두면 후배 검사들이 소신 수사를 할 수 없을 것’이라며 직무를 수행했다. 그러자 이 대통령 측은 52년 부산에서 이 대통령 저격미수사건이 터지자 이 사건에 김 총장이 연루됐다면서 고검장직에서 파면하고 구속했다. 김 총장은 재판에서 무죄를 받고 풀려났지만 얼마 뒤 세상을 떠난 것으로 알고 있다.”

-김진태 검찰총장 후보자와 같이 일해본 적이 있나.
“내가 총장으로 재직할 때 그를 중수부 과장으로 임명했다. 당시 대통령 아들 수사 주임 검사를 시켰다. 그는 수사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아무 잡음도 내지 않았다. 훌륭한 검사였다. 그를 보고 ‘고집불통’이라고들 하는데 이유 없는 고집을 부리는 걸 보지 못했다. 그런 고집이 총장직에 큰 자산이 될 것으로 본다. 독실한 불교 신자라고 한다.”

-이유 있는 고집쟁이란 얘긴가.
“어떤 압력에도 휘둘리지 않을 사람이다. 정치권과 국민에게 공정하다는 평가를 받을 사람이다. 리더에겐 선견력(先見力)이 중요한데 그는 이런 능력이 있다. 위기에 처한 검찰을 잘 추스를 것으로 기대한다.”

-새 검찰총장의 과제는.
“국정원 댓글 수사 논란으로 검찰이 휘청대고 있다. 새 총장은 무엇보다도 이 사건을 철저히 수사하고 공소유지에 완벽을 기해 유죄선고를 끌어내야 한다. 또 흩어진 검사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 조직의 안정을 되찾아야 한다.”

-새 검찰총장에게 당부하고 싶은 건.
“역대 정권들이 검찰을 독립 아닌 장악의 대상으로 봐온 측면이 있다. 그러나 검찰이 불신받는 근본 원인은 검찰 자신에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검찰이 진정 독립을 원한다면 스스로 엄격해져야 하고 국민 입장에서 형평과 정의에 입각해 권한을 행사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화를 입게 된다. 검찰의 제단에 몸을 바칠 각오를 해야 한다.”

-‘검찰총장에겐 불면의 밤이 올 것’이라고 했다.
“총장이 되면 대한민국의 모든 고민을 한 몸에 안고 살게 된다. 백리 밖의 불길로 보이던 나라 안의 각종 갈등이 금방 검찰에 발등의 불로 다가온다. 그러니 고뇌와 불면의 밤이 계속될 수밖에 없다.”

-본인도 총장 시절 불면의 밤을 보낸 듯하다.
“총장에 앞서 중수부장 시절부터 그랬다. 부장이 되면 집에 특수전화기가 설치된다. 새벽 4시면 전화가 울린다. 사건이 터진 것이다. 그 벨소리가 제일 무서웠다.”

-선배 검사 중 존경하는 인사가 있는가.
“초임 검사 때부터 모셔왔고 늘 존경하는 분이 계신다. 그분은 항상 ‘정도(正道·바른 길)로 수사하라’고 강조했다. 후배들이 일이 많을 때는 함께 밤을 새우며 거들었다. 야단칠 때는 무섭게 했다. 그러고는 잊어버리셨다. 퇴근 길에는 소주를 사주며 달래주셨다. 그분을 닮아야겠다는 생각으로 검사 생활을 했다.”

-후배 검사들에게 하고 싶은 조언은.
“자리가 아니라 일로 평가받는 검사가 되라는 것이다. 검사가 되면 남들이 알아주는 특수부나 공안부에서 이름을 날리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작은 사건 하나 하나를 잘 처리하는 게 더 중요하다. 당사자들의 운명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또 검찰권의 정당성은 법이 아니라 고도의 청렴성과 도덕성에 근거한다는 걸 명심하기 바란다. 검사는 일종의 사회공학자다. 사회현상에 늘 관심을 가져야 문제를 풀 수 있다.”

-박근혜 대통령에게 제언하고 싶은 것은.
“국민과 신뢰를 토대로 강한 연대감을 구축하고 원칙을 고수하며 용기를 보여줘야 한다. 정책의 방법은 유연해도 방향은 일관성을 가져야 한다. 박 대통령이 지금까진 이렇게 해왔다고 본다. 이와 함께 검찰의 독립성을 존중해 ‘사상 가장 위대한 검찰총장’을 탄생시키기 바란다.”

-혈색이 좋은데 건강의 비결은.
“매일 50분가량 걸은 뒤 동네 목욕탕에서 20분간 반신욕을 한다. 건강에 관심 있는 이들에게 권하고 싶다. 살도 빠진다. 그리고 가정의 평화를 위해 설거지를 한다.”

-‘운명이 없다고만은 할 수 없다’고 했다.
“법대 졸업 뒤 5년 만에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시험에 자꾸 떨어지니 한때 포기하고 은행에 다니기도 했다. 그때는 은행에서 월급을 많이 줬다. 그러나 이유는 모르겠지만 도저히 은행에 다니고 싶지 않았다. 휴직하고 재도전한 끝에 합격해 검사가 됐다. 대구 팔공산 자락 암자 ‘환성사’에서 공부할 때 사주를 보러 갔는데 ‘27세가 돼야 합격할 것’이라고 하더라. 그런데 27세가 되던 해에 딱 합격했다. 사람에겐 운명이라는 게 없다고 할 수 없지 않은가 싶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어차피 참고 걸어가는 먼 길이다. 좋은 일도, 어려운 일도 많은 길이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가변성을 가진다. 그래서 ‘지금’ 그리고 ‘여기’를 소중히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검찰에 몸담던 시절 인생의 절정기에 있던 인사들을 수사하며 그들의 영욕을 지켜보았다. 잘나가던 사람이 한 발자국 더 나가겠다고 욕심을 부리다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목도했다. 분수를 지키며 사는 사람이 행복한 인생이란 교훈을 그때 얻었다. 도전도 야망도 분수에 맞게 가져야 한다.”
 

“법조 엘리트들 우선 잘 들을 줄 알아야 ‘내가 사건 다 알고 있다’는 생각은 위험”

이공현 전 헌재 재판관

이광재 객원 칼럼니스트·전 강원도지사 | 제351호 | 20131201 입력
 

이공현 1949년 전남 구례 출생. 광주일고와 서울대 법대를 졸업했다. 71년 13회 사법시험에 합격한 뒤 서울지방법원 판사로 법조계에 발을 내디뎠다. 이어 대법원장 비서실장과 법원행정처 차장 등 법원 내 요직을 두루 거쳤다. 2005년부터 6년간 헌법재판소 재판관으로 재임했다. 당시 사형제와 간통죄에 합헌 결정을, ‘미네르바’ 사건엔 위헌 판결을 내린 바 있다. 현재 법무법인 지평지성 대표변호사로 재직 중이다.

 
이명재 전 검찰총장이 “검찰이 되살아나려면 수사의 중립성을 확고히 지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에 따라 이공현(63·사진) 전 헌재 재판관을 만나 법원과 검찰의 중립성을 확보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론을 들어봤다. 그는 만 23세에 최연소 판사로 법복을 입은 이래 38여 년간 민사·형사·행정 분야에서 다양한 재판을 경험했다.

-40년 가까이 판사와 헌법재판관을 하다 변호사로 전환하면서 느낀 점은.
“변호사를 해보니 판사, 헌법재판관에 앞서 변호사를 했더라면 더 잘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법이라는 게 요건과 사실만 갖추면 된다지만 세상일은 그렇게 일률적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변호사를 했던 사람을 판사나 검사에 임명하자는 주장에 찬반양론이 있는데.
“변호사를 하다 판사를 한다는 것 자체에 어려운 측면이 있다. 그러나 사건은 천차만별이다. 판사 임용에 앞서 경험을 쌓는 게 사건의 실체를 바라보는 데 도움이 된다. 변호사 경험을 가진 인사가 검사나 판사를 맡는 게 필요하다.”

-한 여론조사를 보면 법원에 대한 신뢰도가 15.7%에 불과한 것으로 나왔다.
“법원은 심판자로서 판결을 하고 검찰은 공익의 대변자로서 공소 유지를 한다. 그런데 헌법과 법률에 기초해 공소가 이뤄지고 있지 않아 그런 불신을 받는 것이다.”

-고시에 합격한 엘리트들은 임용 뒤에도 열심히 일한다. 그럼에도 신뢰도가 낮은데 이를 높이는 방법은.
“(국민의 말을) 잘 듣는 것이다. 법조 엘리트들은 ‘내가 사건을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여기서 벗어나 우선 잘 들어야 한다. 그리고 뼈저리게 생각해야 한다.”

-판사를 지낸 지 8년 만에 교회에 나가게 됐다고 했다.
“처음 판사에 임용됐을 때는 자신만만했다. 그런데 강도살인 사건을 맡으면서 기가 꺾였다. 검사는 유죄를, 피고인은 무죄를 주장했기 때문이다. 등에서 식은땀이 났다. 사람이 사람을 재판하는 게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 나 자신이 겸손해지기 위해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미국·프랑스의 무죄율은 대략 9%다. 반면 한국과 일본은 1% 선에 불과하다.
“헌법에 형법 절차가 규정돼 있다. 합리적 의심을 충족할 증거가 제시될 때만 유죄를 주게 돼 있다. 그렇지 못해 합리적 의심이 들면 무죄를 줘야 한다. 공권력을 동원해 얻은 (검찰의) 막대한 증거 능력과 피고인 개인이 가진 증거 능력을 단순 비교해선 안 된다.”

-판사와 검사가 엄격히 분리돼야 하나 우리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는 지적이 있다.
“우리는 외국과 달리 정부가 소수의 법조인을 선발하고 판검사 후보생들이 사법연수원에서 함께 생활한다. 이런 경험으로 인해 판사가 피고인보다 검사를 더 신뢰하게 될 수 있다. 그러나 판사는 심판자로서 엄격함을 유지해야 한다. 인맥이 중요한 한국 사회에선 더더욱 그렇다.”

-그러다 보니 국민은 국민참여재판을 요구하는데.
“시대적인 흐름이라 인식해야 한다. 국민의 납득과 신뢰가 중요하다. 국민참여재판을 하면 비용이 커지고 절차도 복잡해지나 이를 감수해서라도 재판이 공정했다는 믿음이 자리잡게 해야 한다. 일정 사안에는 국민참여재판을 도입하고 사후평가를 통해 그 폭을 결정해 가야 한다.”

-그러나 한국은 인맥과 정으로 움직이는 사회라 배심원제가 부적절하다는 지적도 있는데.
“안다. 그러나 배심원에 선발된 사람들은 자신들의 희생을 감수하고 참여하고 있다. 배심원을 객관적·합리적으로 선발하려 노력하고 있다. 성과도 긍정적이라고 본다.”

-대법원 대법관 12명이 1년에 3만 건을 재판한다. 근본적 변화가 필요한 것 아닌가.
“사건은 적어도 세 번은 재판해야 한다는 게 국민적 인식이다. 1년에서 주말을 빼면 250여 일뿐이니 하루에 10건씩 판결을 내려야 한다. 게다가 대법원 연구관은 100명 선에 불과하다. 사건이 이렇게 과다하면 사법부에 불신이 생겨나는 요인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대법원을 이원적으로 운영하자는 논의도 있다. 대안을 모색할 때가 왔다.”

-대법관은 대법원장의 추천을 받아 대통령이 임명하게 돼 있어 정치적 중립성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대통령과 대법원장 자리는 고도의 정치행위의 산물이다. 대법관 후보자 추천위원회가 좀 더 분명하고 공정하게 역할을 해야 한다. 또 정치권력도 대법원을 움직이려는 욕망을 가져선 안 된다. 미국처럼 종신제 대법관 제도를 가진 나라도 있다.”

-헌법재판관도 대통령과 국회·대법원장이 추천하게 돼 있어 중립성 논란이 이어진다.
“현 제도가 적절하다고 본다. 헌법재판소는 다양성을 확보해야 국민의 신뢰를 얻는다. 1948년부터 88년까지 위헌 판결은 단 5건뿐이었다. 반면 88년 헌재 출범 이후 20여 년 만에 위헌결정이 400여 건이나 나왔다. 장식품이던 헌법이 진짜 법으로 살아난 거다.”

-검찰의 기소독점권에 대해선 어떻게 보나.
“참 어려운 문제다. 헌법과 법률에 주어진 틀 안에서 검찰의 권한이 행사돼야 한다. 권력자도 검찰을 통치에 이용하려 해선 안 된다. (피의사실 공표 부분은 더 엄격히 제한될 필요가 있는데) 당연하다.”

-법조인 출신 국회의원이 갈수록 늘고 있다.
“선진국도 그렇다. 입법부에 법조인이 많으면 전문성 측면에서 도움이 된다.”

-민주주의에선 ‘다수결 원칙’을 중시한다. 그러나 플라톤은 소크라테스가 사형당한 뒤 ‘과연 다수는 진리인가’라고 물었는데.
“민주주의는 주권재민과 다수결의 의사결정이 핵심이다. 그러나 다수의 의견이 중요하지만 그것이 진정한 가치를 가졌느냐도 중요하다. 다수결로 선출된 독일의 나치 권력은 전대미문의 폭정을 저질렀다. 그래서 민주주의나 다수결 외에 헌법 같은 근본 규범에 의해서도 권력이 통제돼야 한다는 반성이 생겨났다. 그 결과 헌법재판소가 탄생했다.”

-타협이 끝내 안 돼 다수결로 결정해야 할 때가 온다면.
“타협을 얼마나 시도했느냐가 중요하다. 헌법재판소에 있어 보니 여야 모두 자신들이 다수당일 땐 다수결 원칙이 중요하다고 주장하더라. 그러나 소수당일 땐 ‘소수의 권리’를 강조하며 ‘다수에 의해 권리가 침해됐다’고 하더라. 이래선 안 된다.”

-헌법 개정 논의는 어떻게 보나.
“지금까지 우리는 헌법을 9차례나 고쳤다. 영국은 불문헌법 국가지만 선진국이다. 우리 헌법도 이제는 수출해도 될 만큼 잘 만들어져 있다. 헌법을 잘 지키고 있느냐가 더 중요한 문제라고 본다.”

-행정부처에서 예규를 만들 때 인원과 조직에 제한이 있는데.
“행정부가 작성한 지침, 예규가 국민에겐 헌법과 법률보다 큰 힘을 발휘한다. 실질적인 규제가 숨어 있다. 범정부적인 노력을 기울여 국가 시스템을 만들 때가 왔다. 법률과 시행령, 규칙이 충돌하다 보니 국회에서 시행령, 규칙으로 정할 내용을 법으로 정하려 하거나 사전 심사를 요구한다.”

-후배 법조인들에게 조언하고 싶은 것은.
“법조인 중엔 세 부류가 있다. 그냥 공부 잘해 법조인이 된 모범생, 법조인이 됐음에도 법조 업무를 싫어하는 사람, 그리고 자신의 일을 즐기는 사람이 있다. 훌륭한 법조인이 되려면 법을 좋아해야 한다. 그저 법조인이 되려 하지 말아야 한다. 자기를 가장 사랑하고 열정을 바치는 곳에 인생을 투자하라고 권하고 싶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고시 동기생 모두 같은 꿈을 갖고 출발했지만 결과를 보니 그게 아니더라. 재능과 적성을 따라 사는 게 행복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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