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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6주년 기획 이광재가 원로에게 묻다 <20> 김성수 대한성공회 대주교 - 이광재 객원교수 (20131215. 중앙sun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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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12-23 00:00:00

 

“토끼 안 깨우고 이긴 거북이는 반칙 … 더불어 살아야 행복”

창간 6주년 기획 이광재가 원로에게 묻다 <20> 김성수 대한성공회 대주교

대담·글=이광재 객원 칼럼니스트·전 강원도지사 | 제353호 | 20131215 입력
국내의 성공회 신자는 10만 명이 채 안 된다. 하지만 김성수(83·사진) 성공회 대주교가 우리 사회에서 갖는 위상은 높다. 서른 넷 늦깎이로 신부의 길에 들어선 그는 1970년대 우리나라 최초의 지적장애인 특수학교인 성베드로학교를 세워 교장으로 10년 넘게 일했다. 87년엔 성공회 서울교구장으로 ‘4·13 호헌 철폐를 위한 미사’를 집전해 6·10 항쟁의 서막을 열었다. 2000년엔 부친에게 물려받은 인천시 강화도 온수리의 대지 9919㎡(3000평)를 쾌척해 정신지체장애인 직업 재활시설인 ‘우리마을’을 설립했다. 성공회대 총장에서 은퇴한 2005년 이래 우리마을에서 할아버지 촌장으로 장애우 50여 명과 살고 있는 김 대주교를 지난 주말 만났다. 끝없이 이어지는 여야 간 정쟁과 장성택 처형으로 요동치는 북한 정세 탓에 유난히 체감온도가 낮은 올겨울, 이웃사랑을 온몸으로 실천해온 김 대주교의 삶 속에서 용기와 희망의 씨앗을 찾기 위함이었다.
 

김성수 1930년 경기도 강화 출생. 단국대 정치학과 졸업 후 연세대 신학과를 수료해 성공회 사제 서품을 받았다. 성공회대의 전신인 성미가엘신학원 신학 석사학위를 취득했으며 세례명은 ‘시몬’이다. 대한민국 최초의 정신지체장애인 특수학교 성베드로학교를 설립했고 2000년 정신지체장애인 직업 재활시설인 ‘우리마을’을 설립해 촌장을 맡고 있다. 대한성공회 초대 관구장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의장, ‘바른 언론을 위한 시민연합’ 공동대표를 역임했다. 공동체의식개혁국민운동협의회 원로위원, 유니세프 한국위원회 이사를 맡고 있으며 ‘사랑의 친구들’ 회장과 푸르메 재단 이사장을 겸임하고 있다. 81년 장애인 교육과 복지에 힘쓴 공로를 인정 받아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대학에선 신학이 아니라 정치학(단국대)을 전공했다.
“고3 때부터 10년간 폐결핵으로 고생했다. 돈이 없어 당시 결핵 치료에 최고였던 마산 요양원에 가지 못했다. 그땐 폐결핵 환자라고 하면 사람들이 보는 것조차 꺼렸다. 외로운 시간이었다. 강화도에서 투병하면서 가난한 이를 많이 보았다. 나보다 더 외롭고 힘든 사람이 많다는 생각이 병을 이겨내게 했는지 모른다.”

-성직자의 길을 가게 된 계기는.
“대학을 마친 뒤 다니던 회사가 수원으로 이사했다. 그곳에선 성공회가 운영하는 베드로고아원에 방을 얻어 회사를 다녔다. 어려운 환경에 있는 아이들을 좋아했다. 고아원에서 밥을 해주던 아주머니들이 그 모습을 보고 내게 신부가 되는 길을 선택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권했다. 내 갈 길을 깨닫는 계기가 됐다. 운명 같은 거랄까….”

 

김성수 대한성공회 대주교(왼쪽)와 이광재 전 강원도지사. 조용철 기자

-인간은 사명을 갖고 태어난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인간은 줄을 하나씩 갖고 태어난다. 어떤 줄을 잡느냐도 중요하고, 줄을 잡은 뒤 어떻게 사느냐도 중요하다.”

-줄은 어디 있고, 사명은 어떻게 발견하는 것인가.
“나처럼 고아원에서 밥하는 아주머니들 말을 듣고 인생의 전기가 생기기도 한다. 남의 말을 잘 들어야 한다. 또 스스로 개척해서 깨닫기도 한다. 결국 자신이 무슨 존재인지 깨달아야 한다. 자신의 가능성도, 시간의 유한성도 깨닫는 게 중요하다. 자기를 깨닫는 시간에 푹 빠져보면 알게 된다.”

-신학교 다니던 시절 일화가 있다면.
“30세에 신학생이 되니 어린 동기들에 비해 성적이 많이 떨어졌다. 미국인 신부가 구약을 가르쳤는데 내 시험 답안지를 보더니 점수는 안 주고 ‘마이동풍(馬耳東風)’이라고 평했다.(웃음) 하지만 배운 건 많았다.”

-어떤 것을 배웠나.
“65년 태백시에 예수회 수도원을 지어 빈부격차 없는 신앙공동체를 만들었던 대천덕 신부가 스승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는 늘 ‘공부도 좋지만 실질적인 지식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한국이 농업국인데, 화학비료 같은 서양 물건만 좋아하지 말고 동양적인 것을 찾아야 한다고 충고했다. 그러면서 땅을 풍요롭게 하는 지렁이를 기르고, 돼지를 키운 뒤 그 배설물을 거름 삼아 수박을 재배하는 방법을 가르쳤다.”

-그래서 수박과 지렁이를 팔았나.
“서울 남산에 외국인들이 많이 살았다. 그곳을 찾아가 농사 지은 수박을 팔았다. 익지도 않은 수박을 판다고 꾸중을 들은 적도 있다. 낚시하는 사람들을 위해 지렁이를 팔러 가기도 했다. 하지만 지렁이를 직접 만질 수는 없었다.”

-신부 생활을 하며 감동을 받은 사건이 있다면.
“신부 생활은 늘 감동이다. 감동이 없으면 신부로 못 산다. 신부에겐 가족이 없다. 가난한 이가 죽으면 망자를 애도하고, 수녀와 함께 입관을 한다. 불쌍한 마음이 물밀 듯 밀려올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불평등한데.
“그것이 인생의 모순이면서 묘미다. 태어날 땐 가난하게 태어났지만 결과는 모르는 것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을 보면 낙도 출신의 가난한 소년이 나라의 지도자가 된 대표적인 경우 아닌가? 그는 두 번이나 죽음 직전까지 갔다. 그러나 승리했다. 인생은 결과가 중요하다.”

-40년 전 우리나라 최초의 지적장애인 특수학교를 세웠는데.
“나를 신부의 길로 들어서게 한 수원의 고아원이 원아들이 성장하면서 문을 닫았다. 원아들이 갈 곳이 없게 됐다. 그래서 고아와 장애인을 위한 목회를 연구했다. 캐나다와 미국·일본 연수도 다녀왔다. 이를 바탕으로 지적장애인을 위한 중·고교를 설립하게 됐다.”

-지적장애인 학생들은 학업을 마쳐도 졸업식장에는 나타나지 않았다고 하던데.
“그들이 졸업식에 오지 않는 이유는 학교를 떠나면 갈 곳이 없고, 학교로 돌아올 수도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장애 학생의 부모들은 ‘우리 아이가 졸업하면 어디로 가야 하느냐’고 울며 내게 하소연을 했다. 궁리 끝에 그들이 자립해 살 수 있도록 일자리 공동체를 세우자고 제안했다. 그러자 부모들은 내가 땅만 내면 돈을 대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럴 만한 돈이 있는 학부모는 거의 없었다. 막막했다.”

-그때 구세주가 손학규 당시 보건복지부 장관(96년 11월~97년 8월 재임)이었다는데.
“교육부를 찾아가 지원을 요청했지만 들은 척도 안 하더라. 결국 손학규 복지부 장관실로 찾아갔다. ‘장애인들을 위한 일자리가 필요하다. 내 선친이 갖고 있던 강화도 땅을 내놓겠다’며 도움을 호소했다. 손 장관은 ‘의미 있는 일’이라며 20억원을 지원해 줬다.”

-손 전 장관은 그 뒤 자주 보나.
“우리 마을에 행사가 있을 때마다 찾아왔다. 그래서 손 전 장관 보고 ‘이곳이 당신 집’이라고 했다. 그가 지난해 대선 때 내놓은 ‘저녁이 있는 삶’이란 슬로건이 참 좋았다. 그는 참 신사인데 뜻대로만은 안 되는 것을 보니 정치는 어렵다.(웃음)”

-그 일자리 공동체를 ‘우리마을’이라 이름붙였다. 우리마을에선 무슨 사업을 했나.
“수업료를 많이 냈다. 나와 장애우들이 자립해 일자리를 만들어서 먹고살아야 했다. 상추 수경재배에 뛰어들고 고추와 버섯도 길렀다. 닭도 키워 보았지만 다 잘 안 되더라. ‘세상에 쉬운 일은 하나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다가 콩나물 공장을 시작했다.”

-콩나물 공장은 잘됐나.
“콩나물은 쉽게 상하지 않아 장애인들이 잘할 수 있는 품목이었다. 정부는 장애인에게 보조금을 주는 대신 일자리를 줘야 한다. 그게 진정한 민주주의 국가다. 지금은 장애인 42명이 공동체에서 기숙한다. 출퇴근하는 사람을 합하면 60명이 함께 지내는 보금자리가 됐다.”

-콩나물 사업이 잘되면서 공장을 증설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는데.
“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본다. 2년 전 풀무원 사장이 찾아와 콩나물 재배법을 직접 가르쳐 줬다. 그 뒤 콩나물 품질이 월등히 좋아졌다. 풀무원을 비롯해 콩나물 판로도 점점 늘어났다. 이에 따라 공장을 넓힐 필요가 생겼다. 8000만~1억원이면 공장을 늘려 장애인들을 더 고용할 수 있다.”

-스페인에선 장애인들이 복권을 팔아 수입을 얻게 한다. 또 복권수익금 상당액을 장애인 단체에 줘 일자리 창출에 쓰게 한다.
“아주 좋은 제도다. 스페인은 그뿐 아니라 장애인 기업에 대해 경영 전문가들이 ‘사업성이 있다’고 평가하면 정부가 나서 고용을 지원해 준다. 우리도 스페인 사례를 도입하면 좋을 것이다.”

-‘우리마을’ 팸플릿을 보니 유명한 후원자가 많던데.
“‘아이쿱’이라는 생활협동조합과 풀무원이 많이 도와줬다. 또 삼성코닝에선 1주일에 하루를 구내식당에서 콩나물 먹는 날로 정하고 우리 제품을 구매해 준다. 또 에버랜드도 구경시켜 주고, 옷도 한 벌씩 준다. 한화 김승연 회장도 많이 도와줬다. 정부가 이유가 있어 그를 가뒀겠지만, 이제는 세상에 내보내 죄보다 더 큰 기여를 하도록 해주면 좋겠다.”

-아이들에게 ‘기부 교육’을 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해 왔다.
“대기업들이 큰돈을 기부하는 건 중요하다. 그리고 부모가 어린아이와 같이 길을 가다가 어려운 이웃을 보면 기부하는 것도 아름다운 일이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아이들에게 기부 전용 저금통을 줘서 100원, 200원씩 모았다가 기부하게끔 가르치는 것이다. 이웃을 돕는 마음을 키워야 한다.”

-장애인 정책을 위해 교육부와 복지부를 통합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현재 정부의 장애인 사업은 복지부, 교육부에서 따로 한다. 부처 간 장벽을 없애야 한다. 우리 마을에 ‘브릿지 스쿨’이 있다. 인천 교육청에서 지적장애 학생 지원을 위해 제공하는 예산으로 운영된다. 지자체 차원에서 이런 사업을 시범적으로 해본 뒤 전국으로 확대할 필요가 있다.”

-장애인을 만날 때 진한 감동을 받는다고 밝혔는데.
“장애인들에게 배우는 게 너무 많다. 운동회에서 달리기 시합이 열렸다. 맨 앞에서 달리던 아이가 뒤를 돌아보더니 뒤에서 달려오는 아이에게 ‘빨리 오라’면서 기다리더라. 마지막 골인지점에서 두 아이가 서로 등을 떠밀면서 1등을 양보하는 것도 보았다. 감동 그 자체였다. 또 한 번은 어떤 아이가 달리기를 하면서 앞으로 안 가고 뒤로 달려가 엄마한테 ‘내가 1등을 했다’고 자랑하는 것을 보았다. 엄마 심정이 어땠겠는가? 가슴이 무너져 우는 엄마를 보고 며칠 동안 잠을 못 잔 적도 있다.”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 우화에서 거북이가 반칙을 한 것이라고 지적했는데.
“영국을 찾은 적이 있다. 유치원에서 이 우화를 얘기해 주며 ‘열심히 노력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때 한 꼬마가 일어나서 ‘거북이가 반칙을 했다’고 말했다. 토끼가 자면 깨워서 같이 정정당당하게 경주를 해야 한다는 얘기였다. 큰 충격을 받았다. 우리는 1등 만능주의만 외치며 양보하는 법을 가르치지 않는다. 더불어 살면 행복한데 말이다.”

-행복한 인생이란 어디에서 오는가.
“행복을 찾지 말고 내가 먼저 내 손이 필요한 곳을 찾아 나서면 문제가 해결된다. 할아버지가 병에 걸려 외롭게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런데 강아지가 문을 열어 달라고 문을 긁어댔다. 할아버지는 ‘외롭고 쓸모없어진 나를 강아지가 필요로 하고 있다’란 걸 알게 됐다. 그런 마음이 할아버지의 병을 낫게 했다. 행복을 멀리서 찾지 말고 바로 이웃에서 찾고, 아는 걸 실천하면 ‘힐링’이란 말은 쑥 들어갈 것이다. 더불어 살면 행복하다.”

-성경의 어떤 구절을 가장 좋아하나.
“주기도문을 좋아한다. 주기도문에는 ‘우리’란 단어가 여섯 번이나 나온다. 자꾸 너, 나로 나누지 말아야 한다. 늘 혼자면 편하긴 하지만 둘이 함께하면 더 좋은 일, 더 큰 일을 할 수 있다. 자신만이 옳다고 싸우지 말고 서로 협의하면서 시행착오를 극복하면 아름다운 결과가 나온다. 예수는 말로만 ‘주여, 주여’ 한다고 천당 가는 게 아니라 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씀했다. 그의 가르침, 즉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주는 것이다. 나는 너무 많은 사랑을 받고 살았다. 내가 장애우들을 위해 땅을 기증했다고 하지만 그 땅은 부모가 물려준 것에 불과하다. 내 옆 동네에 대안학교를 만든 인사는 학교가 자리를 잡자 이사장직을 포함해 모든 권리를 내놓고 떠났다. 그런데 나는 이 마을을 떠나면 늙은 나를 누가 보살펴 줄까 걱정돼 못 떠나고 있다. 하나님을 믿고 떠나야 하는데 용기가 없다. 고개 숙여 마을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다, ‘여러분 때문에 살아갑니다. 더 못난이가 되겠습니다’라고 말이다.”

-우리마을의 향후 숙원은 무엇인가.
“양로원을 세우는 것이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가장 나이 많은 이가 54세다. 이곳도 정년이 있어 4년 뒤면 마을의 직장을 떠나야 한다. 그러나 갈 곳이 없다. 그들이 노후를 보낼 수 있는 보금자리를 마련해 주고 싶다. 우리 마을 옆에 SK 프로야구 2군팀이 들어온다고 한다. 그러면 야구팬들이 많이 와 우리마을이 더 활기를 띠게 될 것이다.”

-콩나물국밥집을 열어야 하지 않을까.
“(웃음) 그래야지. 일자리를 만드는 것만큼 소중한 게 없다. 이곳에서 일하는 보조교사들은 하루에 24시간을 일한다. 2교대로 해보려고 했지만 인력 형편상 쉽지가 않다. 다들 너무 고생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은 ‘엄마’ ‘사랑’ ‘봉사’일 것이다. 이들을 관통하는 것은 실천이다.”

-박근혜 대통령에게 조언하고 싶은 게 있다면.
“본인이 건강해야 남을 건강하게 할 수 있다. (한참 생각하다) 또 나 말고 주변에 남들이 있다는 것을 꼭 기억해 주길 바란다. 상대방이 아무리 미워도 먼저 사랑을 나누면 사랑이 싹트게 돼 있다. 잘못된 것이 있어도 비판 대신 ‘우리 함께 고쳐 나가자’는 마음과 노력이 중요하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글쎄다. 예수도 부처도 겸손한 분들이어서 인생이 뭔지 말씀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정리하기 어려운 문제다. 맡은 일을 열심히 실천하면서 사는 것이다.”
http://sunday.joins.com/article/view.asp?aid=32446
 

“직원들에게 애국심·효도·나눔 강조 기부는 제3의 자본 … 과감한 세금 혜택을”

류시문 ‘노블레스 오블리주 시민실천’ 대표 공동회장

이광재 객원 칼럼니스트·전 강원도지사 | 제353호 | 20131215 입력
 

류시문 1948년 경북 예천 출생. 한국신학대를 거쳐 연세대 행정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어릴 적 사고로 다리를 다쳤고 청력까지 약화돼 장애인이 됐지만 한맥안전진단과 한맥도시개발 등 기업을 일궈내며 사업가로 성공했다. 한국참여자치장애인총연합회 총재, 한국사회적기업진흥원 초대 원장을 역임했다.

김성수 대주교가 ‘돕고 나누며 사는 삶’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에 따라 ‘노블레스 오블리주 시민실천’ 대표 공동회장을 맡고 있는 류시문(65·사진) 한맥도시개발 회장을 만나 기부의 구체적인 방법론을 들어봤다. 1억원 이상을 어려운 이웃에게 기부한 인사 380명이 회원으로 있는 단체를 이끌어 온 그는 지금까지 30억원을 기부했고 아들도 1억원을 기부했다. 그는 “사회복지사 가운데에서 청와대 복지수석을 발탁하고, 기부자들에겐 과감한 세금 혜택 조치를 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부자(父子)가 거액을 이웃돕기에 기부했다.
“아들에게 유산을 물려주지 않겠다고 선언하니 어머니가 하나뿐인 손자가 걱정돼 평생 저축한 1억원을 아들에게 줬다. 그 돈은 어머니가 폐지를 모으며 손에 피가 맺히고 손톱이 빠지며 모은 돈이다. 그러자 27세 아들은 ‘자수성가해 가난한 사람들을 돕겠다’며 그 돈을 기부했다. 처음엔 나도 당황했다. 감동도 걱정도 있다.”

-사회적 약자를 위해 기부를 결심하게 된 동기는.
“(눈물을 흘리며) 7세 때 마을 뒷산에서 놀다 다리를 다쳤고 중이염까지 걸렸다. 아버지가 ‘너는 다리도 절고, 두 귀가 안 들려 군대도, 취업도 안 될 거다. 중학교에 보낼 수 없으니 나를 따라 농사를 짓자’고 했다. 아버지 무릎에 엎드려 울었다. ‘중학교에 보내달라’고 읍소했다. 지금도 아버지의 충혈된 눈을 잊을 수 없다. 가난과 장애를 딛고 성공해 어려운 이를 도와주는 사람이 되겠다고 결심했다.”

-한국신학대학을 다녔는데.
“중학교에 가지 못하는 대신 형이라도 고교에 진학하도록 돕기 위해 서울에 올라와 노점상을 하다 교통사고를 당했다. 평생 병원 신세를 지게 됐다. 인생이란 무엇이냐는 물음이 생겼다. 그래서 신학교에 들어갔다.”

-신학교 생활은 어땠나.
“양쪽 귀의 고막이 막혀 선생님 말씀이 잘 안 들렸다. 살아갈 날들이 걱정돼 기숙사 대신 숲속에서 밤을 새웠다. 당시 이여진(지금 총장) 학장과 신연식 교수가 나를 자주 불러 위로해 줬다. ‘너는 마음이 착하니 꼭 성공할 것이다. 어려운 이를 도와주는 사람이 될 것’이라고 했다. 처음엔 한 귀로 듣고 흘렸지만 자꾸 반복되니 큰 힘이 됐다. 위대한 교육은 남을 인정해 주고 칭찬해 주는 것이다.”

-신학교 졸업 후 목회 생활을 했나.
“가장 어려운 곳에서 목회를 하기로 결심하고 추풍령 부근에서 전도사 생활을 시작했다. 낮에는 독거노인들과 함께 일하고 저녁에는 아이들의 공부를 가르쳤다.”

-목회 활동을 그만둔 이유는.
“학교에서 50등 하던 아이가 내게 배우며 성적이 5등까지 올랐다. 아이의 부모가 감사하다며 나를 집으로 초청했다. 모자를 눌러쓴 아이 아버지가 손을 내미는데 손이 오그라져 있었다. 얼굴도 마찬가지였다. 한센병 환자였던 거다. 집으로 돌아와 양치질과 비누질을 쉴 새 없이 했다. 문득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나는 하나님의 종이 될 만한 사람이 못 된다’고 생각했다. 동네를 떠나는데 3명에서 45명으로 불어난 교회 신도들이 울면서 배웅해 줬다.”

-그 뒤 어떻게 됐나.
“평신도로 사업을 해 가난한 이들을 돕겠다고 결심했다. 신문배달원, 가게 점원부터 월부 책 판매원까지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그러다가 건물 안전진단·보수사업을 시작했다. 그 뒤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이 무너지면서 건물 안전 여부가 중요해졌다. 사업이 잘 풀려나갔다.”

-회사 직원들의 부모 통장에 돈을 넣어주었다고 들었다.
“직원들에게 세 가지를 강조했다. 애국심, 효도, 나눔이 그것이었다. 우선 애국심이 중요하다. 우리 회사 노래는 ‘일송정 푸른 솔’이다. 한 달에 한 번씩 불렀다. 둘째는 효도다. 직원들에게 부모와 장인·장모 통장을 만들게 한 뒤 내 개인 돈으로 매월 5만원씩 입금했다. 셋째는 세상은 더불어 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나누고, 기부하라고 했다.”

-자식에게 유산을 남겨주지 않는 이유는.
“자본주의는 자유경쟁원리가 핵심이다. 그러나 공정경쟁엔 취약한 체제다. 부모가 일군 재산을 자식이 물려받기 때문이다. 이는 공정경쟁이 아니다. 센터포워드로 맹활약하는 스타 축구 선수라도 아들에게 센터포워드 자리를 물려줄 수 있는가. 자식에게 금과 은을 물려주지 못해도 정의만은 물려주려는 생각이다.”

-그러면 자식에겐 어디까지 해줘야 하나.
“공부는 시켜줘야 한다. 나는 아들 한 명뿐인데 그가 장가를 가면 집 한 채를 사줄까 하는 고민은 있다. 그러나 내가 보유한 모든 재산은 가족이 손대지 못하도록 변호사에게 공증해 맡겨 두었다.”

-가족의 반대가 컸을 텐데 집에서 안 쫓겨났나.
“다들 처음엔 반대했지만 내 뜻이 워낙 완강했다. 아들 친구들이 내 아들에게 ‘훌륭한 아버지 둔 덕에 거렁뱅이 아들이 됐다. 누가 시집오겠냐’라고 놀린다. (웃음) 다행히 지금 아들은 유산을 물려받을 생각은 하지 않는다. 다만 내 회사 직원들과 공정하게 경쟁할 테니 회사 경영에 참여할 길은 열어 달라고 한다. 생각해 보자고 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천을 강조하는 단체를 만든 이유는.
“우리나라는 지도층이 도덕 불감증에 걸려 있다. 자신과 가족만 잘살려고 할 뿐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 시민이 지향해야 할 공동체정신이 부족하다. 지도층일수록 병역과 납세, 기부를 통해 사회적 약자를 돌봐야 한다.”

-‘사회에 공헌해야 양반이 된다’고 주장했는데.
“조선시대엔 과거 급제를 해 벼슬을 얻어야 지도층이 됐다. 지금은 고시에 합격하거나 의사가 돼 돈을 벌어야 지도층이 되는 것으로 안다. 그러나 미국은 사회에 공헌을 많이 했느냐가 지도층의 척도가 된다. 우리도 달라져야 한다. 기부를 통해 사회에 공헌한 사람이 양반이 되는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려면 기부자들에게 상당한 세금 혜택을 줘야 할 것 같다.
“‘기부’를 제3의 자본으로 봐야 한다. 그러려면 기부자에게 세금 혜택을 줘야 한다. 자본주의는 사유재산 제도가 근간이다. 가진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조정해 양극화를 막아야 하는 것이다. 기부가 중요한 이유다. 복지는 국가가 100% 책임질 수 없다. 민간 기부를 통해 국가의 부족한 복지재원을 보충해야 한다. 기부, 즉 제3의 자본이 쌓이면 인간관계에 신뢰가 생긴다. 존경받는 부자가 나온다. 부자가 지갑을 열수록 세금 혜택을 더 줘야 한다.”

-기부활동에 어려움도 있을 것 같다.
“유산 기부 운동을 해보면 아직은 우리 사회에 저항감이 크다. 외로울 때도 있다. 어려움을 호소하는 사람을 다 도와주지는 못한다. 거절하면 욕이 돌아오는 것도 안타깝다.”

-교회나 사찰도 약자들을 위해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텐데.
“(교회·사찰이) 웅장한 건축물을 짓는 데 힘을 쏟는다. 소외받는 이들을 돌보는 데 더 노력해야 한다. 예수가 다시 이 세상에 온다면 거대한 교회 건물 앞에 설 것인가? 아니면 가난한 노숙자들 앞에 서겠는가? 서구에선 웅장한 교회당들이 텅텅 비어가고 있다.”

-“곤궁한 사람은 자유인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는데.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연두교서에서 한 얘기다. 진정한 개인의 자유는 경제적인 안정과 독립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약자를 가장 가까이서 돌보고 있는 사회복지사들 가운데 복지수석을 임명하기 바란다. 복지 예산이 늘어났지만 정작 꼭 필요한 현장에는 쓰이지 않기 때문이다. 공직사회에 주인의식을 불어넣어야 한다.”
http://sunday.joins.com/article/view.asp?aid=32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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