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형 1925년 서울 출생. 서울대 전신인 경성대학 예과와 서울대 화학공학과를 졸업한 뒤 미국 펜실베이니아대에서 공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 뉴욕에서 한 전자업체 연구소 책임자로 재직하던 65년, 미국을 찾았던 박정희 전 대통령을 만났다. 이를 계기로 이듬해 경제과학심의회의 상임위원을 맡으면서 과학기술처 창설작업을 주도했고 67년 초대 과기처 장관에 발탁됐다. 73년부터 79년까지 제9대 국회의원을 지내며 국회 경제과학위원회에서 활동했다. 그 뒤 학계로 복귀해 한국과학기술진흥재단 이사장(87년)과 KAIST 이사장(90년), 한국과학기술한림원 부원장(94년) 등을 역임했다. 한국자유총연맹 이사와 자유지성 300인회 공동대표, 국회 한·미포럼 특별회원을 맡기도 했다. 도자기산업에도 관심이 많아 파인세라믹스진흥위원회 위원장과 요업(세라믹)기술원(KICET) 운영위원장에 이어 2012년 한국도자문화협회 회장을 맡았다. 장영실기념사업회 명예회장직을 겸하고 있다. 청조근정훈장과 장영실기념사업회 과학문화대상 등을 받았다. 저서로 과학대통령 박정희와 리더십(2010) 등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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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에 성패가 달렸다. 지금부터 시작해도 20~30년 걸린다. 국가 전체가 과학기술에 전력투구해야 미래가 있다. 우리나라는 국토가 좁고 인구는 많다. 하지만 유능한 사람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박정희 대통령과 어떻게 인연을 맺었나.
“1965년 5월 린든 존슨 미국 대통령이 박 대통령을 국빈 초청했다. 월남전에 한국군을 파병한 데 대해 감사를 표하려는 취지였다. 뉴욕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에서 열린 리셉션에 갔더니 참석자 가운데 내가 유일한 공학박사였다. 전자공학을 전공한 나는 당시 미국의 한 전자업체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때 대통령 눈에 띈 거 같다. 날 보더니 ‘또 만납시다’라고 하더라. 그 뒤 아무 소식이 없다가 1년 만에 연락이 왔다. 주미 한국대사를 통해 내게 ‘조국 건설에 참여하도록 한국에 와 달라’는 전문을 보낸 것이다. 즉시 3개월 휴가를 내고 귀국했다.”
-청와대에 들어가 무슨 얘기를 했나.
“박 대통령이 턱을 만지며 창밖을 보더니 ‘김 박사는 국내 사정을 잘 모를 테니 차 한 대를 내주겠다. 전국을 한 달간 돌아본 뒤 보고서를 써 달라’고 하더라. 울산의 공장을 비롯해 학교와 농촌 등 나라 구석구석을 보고 다녔다. 이를 바탕으로 정책보고서를 만들었다.”
-교수직 제의를 거절하고 과학기술부 창설을 건의했다고 들었다.
“보고서를 들고 청와대에서 박 대통령과 독대했다. 아침 10시부터 오후 3시까지 5시간 동안 국수로 점심을 때우며 설명을 이어갔다. 농촌 문제부터 시작했다. ‘미국의 농가는 토지가 평균 500㏊(500만㎡)에 달하고 기계화까지 돼 있지만, 한국은 농가 평균 토지가 0.9ha(9000㎡)밖에 안 된다. 그런데 식구가 10명에 달하니 보릿고개가 수백 년간 반복돼온 것이다. 농촌 젊은이들에게 기술을 가르친 뒤 도시로 내보내야 한다. 미국은 공장마다 수천 명이 일한다. 일본 소니도 10개 이상 공장을 돌린다. ‘우리도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박 대통령은 ‘인하대가 정부 것이니 인하대 교수로 가달라’고 제안했다. 나는 거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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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엔 연구시설이 없다. 우리나라에 중요한 건 하루속히 과학기술 연구기관을 만들고 이를 위한 행정조직, 즉 과학기술부를 창설하는 것이다’고 박 대통령에게 얘기했다. ‘박 대통령을 가까이 모시고 싶다’고도 했다. 그랬더니 박 대통령은 ‘장관급회의인 경제과학심의회의 상임위원에 당신을 임명할 테니 내일부터 출근하라’고 말했다.”
-과학기술처가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인가.
“당시엔 장기영 경제기획원 장관 겸 부총리가 모든 걸 주도하고 있었다. 경제기획심의회의에서 나는 ‘과학기술부를 만들어 경제기획원과 투 톱 체제로 나가야 경제를 일으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선진 각국의 과학기술부처를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도 했다. 이어 선진국의 과학기술부처 실태를 살피기 위해 미국과 영국·스웨덴·독일·프랑스·이탈리아를 방문했다. 인도에선 원자력연구소를 시찰했다. 귀국한 뒤 박 대통령이 주재한 회의에서 총리, 총무처 장관, 무임소 장관과 내가 1시간 동안 집중적인 논의를 했다. 이를 통해 과학기술부를 만드는 정부조직법이 만들어졌다. 1967년 국회에서 이 법이 통과돼 과학기술부가 창설됐고 내가 초대 장관이 됐다. 야당도 과학기술부 창설엔 관대한 입장을 취했다.”
-외국에서 살다가 장관을 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다.
“다들 내가 장관을 할 수 있을까 의심스러워했다. 그런데 예산 문제로 이런 의문이 조기에 풀렸다. 당시 경제기획원은 정부 부처 예산 인상폭을 전년 대비 10% 선으로 제한했다. 신설된 과학기술처는 사업 예산 배정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얘기였다. 당시 농림부 예산이 110억원이었다. 그런데 과학기술처엔 인건비 수준인 10억원밖에 줄 수 없다는 거였다. 밤새 고민하다 새벽 4시에 ‘작전을 하자’고 결단했다. 아침 10시에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예산안 회의가 열렸다. 마흔 살의 초년병 장관인 내가 손을 번쩍 들었다. 다들 의아한 눈초리로 날 쳐다봤다. 총무처 장관이 내 옆구리를 찌르며 ‘앉으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버텼다.”
-긴장된 순간이었겠다.
“박 대통령이 눈을 깜박이더니 내게 발언 기회를 줬다. 나는 ‘새로 생긴 부처 예산을 전년도 기준으로 편성하는 건 부당하다’고 일갈하면서 재심의를 요청했다. 다른 장관들이 불안한 눈빛으로 날 쳐다봤다. 회의실엔 긴장감이 가득했다. 장관이 대통령 앞에서 대놓고 예산안에 반발하는 건 처음이란 얘기도 나왔다. 하지만 대통령은 회의 말미에 ‘과학기술처 예산을 재편성하라’고 지시한 뒤 서재로 들어갔다. 총리가 내게 ‘축하해, 오늘은 과학의 날이야’라고 말했다. 정부 돌아가는 사정을 모르고 용기를 내 발언한 게 과학의 길을 연 거다. 그 뒤부터 과학 관련 예산은 내가 달라는 대로 다 나왔다.”
-장관을 지내며 가장 보람 있었던 일은.
“과학기술 개발의 모태인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을 3년8개월 만에 세운 것이다. 또 영국에서 100만 파운드를 들여와 울산대를 세우고, 뉴질랜드에서 목축업에 필요한 자금을 끌어들인 일도 기억에 남는다. 당시 내가 도와달라고 하면 거절하는 사람이 없었다. KAIST는 내가 71년 장관을 그만둘 때 만든 마지막 작품이다. 미국에서 600만 달러를 들여와 세웠다.”
-KIST가 이룬 성과를 구체적으로 얘기해준다면.
“포스코의 기초 설계를 KIST가 했다. 반도체도 KIST에서 시작했다. 메모리 칩 원형을 만들어 삼성에 판 거다. 냉장고에 들어가는 냉매인 프레온도 KIST 작품이다. 개발안을 만들어 정부에서 보조금을 받은 뒤 공장을 지었다. KIST가 우리 경제의 핵심인 제철업·컴퓨터·가전제조업 탄생에 큰 기여를 한 거다. KIST가 이런 성과를 거둔 데는 내 후임인 최형섭 전 장관의 역할도 컸다.”
-“포스코가 우리 농민에게 진 빚이 많다”며 갚아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박 대통령이 포스코(당시는 포항제철)를 세우기 위해 애를 많이 썼다. 69년 김학렬씨가 부총리를 맡은 뒤 비로소 성사됐다. 포스코 건설을 위해 프랑스에 돈을 빌리려 했지만 실패했다. 결국 박 대통령이 농어촌에 보낼 3700만 달러를 포항제철로 보냈다. 기술은 일본에서 가져왔고 땅은 군부대 부지를 이용했다. 이렇게 어렵게 포항제철을 만들었지만 이로 인해 1000배의 이득을 냈다. 그러니 포스코는 농민들에게 빚을 진 것이다. 앞으로 농어촌 장학금을 조성하는 등의 방법으로 빚을 갚아야 한다.”
-삼성이 ‘기술의 삼성’으로 자리매김한 것도 KAIST 덕분이라고 했다.
“내가 KAIST를 세웠을 무렵 이병철 삼성 회장이 자주 부탁했던 말이 있다. ‘좋은 인재를 보내달라’는 것이었다. KAIST 출신 가운데 4분의 1이 삼성에 발탁됐을 것이다. 삼성의 성장엔 정부의 지원도 주효했다. 67년 전자산업 육성 진흥법을 만들어 전자산업에 투자하는 기업엔 특혜를 준 것이다. 삼성이 지금 수원공장을 지은 건 당시 정부가 40만 평을 평당 300원에 사도록 배려했기 때문이다. 이병철 회장의 결단력도 한몫했다.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반도체를 하겠다고 결정한 게 대표적 사례다.”
-과학기술후원회를 만들면서 박 대통령의 정적인 윤보선 전 대통령의 사촌동생 윤일선씨를 회장으로 추천했다.
“과학기술 발전엔 민간의 역할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그래서 과학기술후원회를 만들었다. 대통령 친서를 받아 후원금을 걷었는데 한 달에 5000만원씩 들어왔다. 결국 1년 만에 6억원이란, 당시로선 거금을 거둬 후원회에 썼다. 윤일선씨를 후원회장으로 추천한 이유는 정부조직법을 개정해 과학기술부를 만드는 과정에서 원자력원(59~67년 원자력 정책을 담당했던 정부기관)이 원자력청으로 바뀌는 바람에 원자력원장이던 윤씨가 실직했기 때문이다. 가슴이 아팠다. 그래서 박 대통령에게 윤씨를 후원회장에 앉혀도 좋겠느냐고 물으니 곧바로 ‘괜찮다’는 답이 돌아왔다.”
-국내에선 괜찮은 기술을 개발해도 투자를 유치하기가 너무 어렵다.
“한국에 실리콘밸리 시스템을 도입해야 한다. 미국 실리콘밸리는 사업가가 실패해도 밀어주는 시스템이다. 실리콘밸리에 가보면 1㎞마다 ‘에인절’ 투자업체들이 깔려 있다. 한 집 들러 안 되면 다른 집에 들러 신기술을 설명하면 투자를 따낼 수 있다. 반면 한국은 사업가가 한 번만 실패하면 영영 기회를 잡을 수 없다. 그러니 대기업 협력업체만 살아남는 거다.”
-학생들이 이공계를 기피한 지 오래다.
“정부 책임이다. 이공계를 활성화하는 길은 간단하다. ‘과학기술을 하면 늙어 죽을 때까지 살 수 있다’는 걸 보여주면 된다. ‘젊은이여 꿈을 가져라’라고만 얘기해선 답을 찾을 수 없다. 과거엔 과학자들에게 고급 공무원 봉급의 3.5배에 달하는 돈을 줬다. 집도 제공했다. 고급 두뇌를 유치하기 위해서였다. KAIST를 설립했을 때도 마찬가지다. 원생들에게 등록금과 기숙사를 제공하고 병역까지 해결해줬다. 그랬기 때문에 10년 만에 세계적인 학자들이 나왔다. 고급 두뇌를 잡으려면 모든 수단을 동원해야 한다. 과학기술에서 진전이 없으면 나라가 망한다.”
-우리 기업들은 두뇌 유치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나.
“이제 우리 기업의 월급 수준이 외국 과학자도 고용할 만큼이 됐다. 삼성과 현대 등은 이미 외국 두뇌를 많이 확보하고 있다. 국가가 나서서 전 세계 인재를 끌어모아야 한다. 그러려면 과감한 전략이 필요하다.”
-지금 한국이 안고 있는 문제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비전을 제시하는 사람이 없다. 비전은 아이디어와 다르다. 비전은 종합적인 체계가 있어야 하고 과학적인 투시력이 있어야 한다.”
-어떤 비전을 가져야 하나.
“과학기술 비전은 20년 앞을 내다봐야 한다. 그러나 나라의 비전은 50년 앞을 봐야 한다. 우리가 가져야 할 나라의 비전은 바로 통일이다. 통일을 실행할 구체적인 구상이 없는 게 문제다. 무엇보다 나라를 과학기술 강국으로 만들어야 한다. 이를 바탕으로 미국과 중국, 일본과 러시아를 종횡으로 연결해 우리 입지를 확보해야 한다. 이는 과학기술에 바탕한 경제력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남북통일 구상은 어떻게 해야 하나.
“우선 미국과 중국을 파이프라인처럼 연결할 수 있도록 한국이 국력을 키워야 한다. 국력을 키우려면 과학기술을 집중 육성해 경제를 키워야 한다. 둘째, 러시아를 촉매로 활용해야 한다. 석유·천연가스 등 러시아 자원이 한국과 만나면 세계로 나갈 수 있다. 그 역할을 부산이 할 수 있다.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경제적 효과로 이어가야 한다. 셋째, 요즘 젊은이들이 일본어를 못하는데 걱정이다. 일본은 여전히 중요하다. 넷째, 지도자가 통일의 비전을 가져야 한다. 통일을 이루려면 신라의 김춘추같이 지략을 가지고 강단 있게 일하는 사람이 필요하다.”
-박근혜 대통령에게 조언하고 싶은 말은.
“세계 100대 기업에 진출한 우리 기업은 삼성 하나뿐이다. 이젠 2~3개 더 늘릴 때가 됐다. 그러려면 구체적인 목표가 필요하다. 무슨 사업, 어떤 제품에 주력한다는 청사진이 나와야 한다는 거다. 스위스는 ‘화이자’란 세계적인 제약회사가 있어 나라를 먹여살린다. 우리라고 왜 못하나? 나는 물류산업을 주목한다. 한국은 배가 있다. 이를 통해 세계 물류의 역사를 다시 쓸 수 있다. 역사상 해양국가와 반도국가가 세계를 이끌었다. 그리스와 로마·영국에 이어 미국이 그 역할을 했다. 다음은 한국이 될 수 있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나는 과학자다. 엔트로피의 법칙에 따르면 생물은 반드시 죽어야 한다. 영원한 것은 없다. 태양도 없어진다. 결국 새로운 태양이 생길 것이다. 이런 전제 아래 인생을 생각해보면 인생은 성실(誠實)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성’(誠·정성)만 있어선 안 되고, ‘실’(實·참됨)이 있어야 한다. 나는 ‘실’이 모자랐다. 행복도 다 성과 실에서 나오는 거다. 그러나 성실만 갖고는 안 된다. 직업을 잘 택해야 한다. 인간의 운명은 직업에 달려 있다. 성실과 직업을 어떻게 연결하느냐가 중요하다. 그 다음, 재치가 있어야 하고 끈기와 집념도 있어야 한다. 이병철 회장이 전자산업에 뛰어들 때 일가친척들을 불러 ‘도장을 전부 가져오라’고 했다. 전자산업에 운명을 건 끝에 성공한 거다. ‘이거다’ 싶을 땐 모든 걸 걸고 도전하며 사는 게 인생이다.”
이광재 노무현 전 대통령의 국회의원 시절 그의 보좌관으로 정계에 입문해 17, 18대 국회의원과 강원도지사(2010~2011년)를 지냈다. 노무현 정부에서 청와대 국정상황실장을 역임했다. 1965년생으로 원주고와 연세대 법대를 졸업했다.